겨울만 되면 손이 아프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몇 해전부터 겨울이 시작되기만 하면
멀쩡했던 손이 잘 트고, 특히 엄지 손톱 주변의 피부가 터실터실해지다가
살에 작은 칼집을 넣은 것처럼 쩍- 갈라지면서 쓰라리고 아프다.
심할 땐 밤에 잘 때도 엄지손가락에 열이 나고 욱신거리는데, 한참을 고생하며
한 군데가 다 나았다 싶으면 또 다른 손이 아프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약도 발라보고, 방수가 된다는 밴드도 붙여보고,
무슨무슨 크림이나 오일이 좋다해서 그런것도 써보고
좀 특별한 고무장갑도 사다 써보고 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물일과 집안일에서 떠나있지 않는 한, 겨울이 얼른 끝나지않는 한, 늘 이럴 모양이다.
보통 때는 그냥그냥 견딜만한데, 가끔 심하게 아픈 날은
부엌일을 하다가 아픈 손이 어디 부딪히거나 차가운 물에 갑자기 닿는 순간,
악! 으악!하는 내 비명소리를 듣고 식구들이 놀라서 달려올 정도다.

그런 날은 남편이 설거지를 대신 해주거나 빨래를 널어주거나 하며 돕는다.
하지만, 육아와 집안일이 어디 그것에서 그칠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건 '나'보다 '손'이 아닐까 하는.
아이가 크고 집안살림이 돌아가는데 여자의 손이 해내는 어마어마한 그 일들.
아마 요즘 내 손이 아픈 건, 10년이 넘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올해 역시, 날씨가 추워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지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아프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손에 좋다는 크림과 오일을 잠들기 전에 떡칠을 하고 해도 별 효과는 없다.
그런데! 올해는 그 어떤 고급 핸드크림보다 훨씬 좋은 든든한 존재가 등장했다는 사실.
바로 딸이다.

IMG_3541.JPG


꽤 어릴 때부터 손끝이 야무지고, 요리나 부엌일을 대충 가르쳐줘도 꼼꼼하게 보며

잘 따라하고 집안일을 할 때, 내맘대로 생략하는 것도 많은 이 엄마에 비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손놀림이 침착하고 정성스러웠던 딸은

나중에 크면 꽤 든든하겠다! -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올해로 11살이 되더니, 막연했던 그 예상은 현실이 되고 있는데..

정말 살림에 이렇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엄마의 아픈 손을 말없이 가만 들여다보던 딸은

틈나는 대로 집안일을 참 많이 도와준다.

CIMG4602.JPG

손이 아픈 엄마가 젤 두려운, 그 많은 저녁 설거지를 대신 해 주거나


DSCN2364.JPG

소파나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마른 빨래들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 가보면, 약간 어설프지만 나름 단정하게 개어져 있곤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피곤한 밤, 방이나 거실을 지나치다 이런 장면을 발견하는 순간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가슴 속에 물결쳐 온다.

CIMG4600.JPG

가장 대견하고 고마울 때는,
동생 실내화까지 두 켤레를 빨아 햇볕 잘 드는 곳에 나란히 세워둔 걸 봤을 때.

자식낳아 키운 보람이 이런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3.5춘기를 보내느라 가끔 나랑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요즘, 가만 생각해보니 딸아이는 올해 들어 참 많이 의젓해졌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둘째 때문에 엄마아빠가 힘들 때마다 얼른 나서서 도와주고,

학교 공부와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내 도움없이도

거의 혼자 다 알아서 한다.

둘째랑 나이 차이도 좀 나고, 늘 든든하게 여기다 보니 남편이나 나나

딸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키가 어느새 훌쩍 큰 딸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지난 11년의 시간들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휙휙 지나가는 것 같다.

첫아이가 딸이었다는 게 나에겐 살면서 누린 가장 큰 축복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한 순간, 한 순간 정말 열심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키웠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아이를 생각하면, 참고 견딜만 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 순간들이 지나고 나니,

이젠 오히려 아이에게 부모인 내가 기대고 의지하는 처지가 된 기분이다. 


마흔이 넘으면서 쉽게 지치는 체력 탓에 점점 신경질적으로 되어가고,

늘 손이 아파 끙끙대는 이 중년 엄마의 쓸쓸한 겨울이

파릇파릇하고 야무진 11살 딸 덕분에 얼마나 따뜻하고 훈훈한지!


딸아.. 나의 첫아가.. 엄마가 많이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구나.

힘들 때마다 욱- 하는 순간들을 잘 참아내지 못하고

마구마구 신경질을 부리며 너희에게 호통치고 잔소리하고..

이제 알 것 다 아는 네가, 그럴 때마다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엄마가 많이 부끄럽고 미안하구나.

너의 의젓함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엄마 인생의 일상적인 푸념과 한숨이

너에게 부담과 짐이 되었던 건 아닐까, 첫째이기 때문에 늘 네가 많이 참을 수밖에

없어 힘들진 않았을까.. 한해가 다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란 옛말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첫째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참고 희생하는 걸 당연시해선 안된다 싶다.

그러니, 남편이여! 딸의 살림솜씨에 흐뭇해하지만 말고, 좀 더 가사노동에 참여하시길.

아들아! 누나에 이어 너도 이제 좀 살림을 배워야하지 않겠니.

네가 어른이 되어 살 시대는 그래야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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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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