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꼭 그렇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서 사건, 사고로 번지며

하나를 채 수습할 새도 없이 더 큰 문제가 터져 놀라고 충격받느라

나라마다 제각각 몸살을 앓고 있다.

 

제 나라 살림에 여유가 없으니

정치가들은 이웃 나라를 비난하고 헐뜯는 자극적인 말들로

국민들을 선동해 자신들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하고

그들의 그런 의도는 양쪽 나라 사람들 감정에 불을 지펴

서로를 전보다 더 미워하고 오해하도록 만드는데

'우리가 다시 친해질 수 있을까' 싶은 한일관계도 그렇고

원전 문제와 방사능이라는 어마어마한 문제,

정치, 경제, 교육 문제, 이젠 의심하고 경계하며 경쟁까지 해야하는 사람관계...

 

세상 사는 게 어찌 이리 복잡하고 힘든지

대도시 도쿄 중심에서 훌쩍 떨어진 작은 동네에서 두 아이 키우며 살고 있는

나같은 아줌마도 도저히 육아와 살림에 집중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요즘 남편은 밥을 먹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불쑥 혼잣말을 한다.

그때 지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원전 사고만 없었더라도...

이렇게 지진이 많은 나라에 원전이 무슨 말이야...!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나도 남편도

지진과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때도 일본 사회는 불황과 경기침체 등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원전 사고 이후를 겪고 있는 지금은

불과 3년도 지나지않은 그 전 시절이 참 좋은 시절이었구나 싶다.

 

일본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하고,

내년 봄부터 실시될 소비세 인상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 문제는 도대체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기사에도 나왔던

'현재 일본인들의 마음도 뭐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이 있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정말 그 말이 꼭 맞다.

몇몇 모자라는 정치인들의 망언이 일본 국민들을 결코 대변한다 할 수 없고

그들의 목적 역시 국민들의 차오르는 불만을 국외로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데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치나 경제 어느 것 하나 희망이 없어보이니

주부들끼리 모이면 가끔 방사능과 원전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이나 대책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다.

'후쿠시마산'이라 쓰인 식재료들은 좀 더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절대로 안 사 먹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쿠시마 주민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더 사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친정이 후쿠시마인 일본인 친구는 후쿠시마산 식재료들이라 해도

다 오염된 것이라 할 수 없고, 후쿠시마와 멀리 떨어진 곳의 농수산물들이

다 안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방사능 검사로 별 이상이 없다 판명된 먹을거리라도

후쿠시마산이라 적힌 것은 절대 사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벌써 7,8년전일까. 큰아이가 아기였을 때, 여름휴가로 놀러갔던 후쿠시마는

한국의 동해를 닮은 바다가 있고 생선과 과일이 무척 맛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젠 위험과 사고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후쿠시마'란 이름이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같다.

 

하지만 막연하게 걱정과 두려움에 떨기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실천하려는 분위기도 공존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지난 13년동안 이용해온 일본의 한 생협단체에서는

원전 사고 직후부터 우유, 고기, 과일, 채소, 쌀 등의 모든 식재료를 대상으로

방사능 검사를 철저하게 해 왔다.

방사능 검사 결과는 생협 물품이 배달될 때마다 조합원에게 보고되는데,

아직까지 기준치를 넘는 품목은 없어 비교적 안심하며 아이들에게 먹이고 있다.

 

IMG_4174(1).JPG

<생협에서 물품이 배달되어 오는 날.

  환경을 위해 우유나 조미료 등도 대부분 재활용이 가능한 병에 담겨 온다.>

 

 

지진 이후, 이 생협의 각 매장 앞에는 <원전 반대>의 깃발이 꽂히고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 개발을 위해 조합원들의 힘을 모아 풍차 건립을 추진해 왔다.

어찌보면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작은 시도들이지만

원전 사고를 원망하고, 방사능에 대한 괴담으로 막연하게 두려움만 키우기보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풀어가야 할 일들을 나부터,

우리 가정부터 하나씩  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고

방사능 검사를 통해 안전한 먹을거리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역시 소비자의 인식과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생협 회원인 친구들과 그동안 꾸려오던 육아와 요리모임도

지진 이후부터는 좀 더 많은 아이와 엄마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을 넓히고

식품첨가물과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먹을거리가 유통되도록 주부들이 스스로 나서고

아이들 성장에 음식이 어떤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지 알리려고 여러 노력들을 하며 궁리중이다.

 

원전사고의 뒷수습과 후유증은

지금도, 앞으로도 일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들도 원전에 대한 위기의식을 다시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고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이제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고도 성장기의 어두운 면을 돌아보고

물질이나 부유함보다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 그들과의 연대,

그리고 자연과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물건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고 집안에 쌓인 불필요한 짐들을 비워낸 자리에

친구를 초대해 소박한 홈파티를 즐기며,

바깥에서 필요이상으로 소비하며 흘려보낸 돈과 시간의 무의미함을 깨닫기도 한다.

 

대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

우리 동네 마트의 폐점 시간이 좀 더 빨라졌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엔 불편해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익숙해졌는데

며칠 전엔 마트 계산대 옆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직원들의 건강과 복지개선을 위해 폐점 시간을 9시 반에서 9시로 당깁니다.

 손님들께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니 양해바랍니다."

 

나는 이런 안내문에서 일본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9시면 문을 닫는 마트 직원들은 그래서인지 늘 친절하고 밝은 표정인데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우선해 폐점시간을 당기는 사업주가 있는 일터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해 일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우리 몸과 영혼이 좀 더 건강해지고 세상살이가 조금만 더 따뜻해진다면

좀 덜 먹어도 행복하지 않을까?

좀 덜 쓰고 좀 불편해도 상관없어지지 않을까?

24시간 치킨과 햄버거를 꼭 먹을 필요가 있을까?

전기를 좀 덜 쓴다고 엄청 불행해질까?

스트레스와 불안을 달래기 위해 더 많이 먹고 소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건 아닐까?

 

몇 주 전에, 큰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흥분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엄마, 엔젤 군이 오늘 죽었어요!

아이들이랑 선생님이 학교 뒤에 묻어주고 모두 얼마나 울었다구요.."

 

엔젤은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 어항에서 자라는 물고기 이름이다.

아이들이 '엔젤 군'이라 부르는 이 물고기는 재작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어항이 깨지는 바람에 꼬리에 상처를 입고 물도 없는 바닥에서 몇 시간이나 지내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물고기라 학교 아이들이 그동안 유난히 아끼며 돌봐왔다.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집 아이는 틈만 나면 '엔젤 군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늘 얘기를 해 나도 학교갈 일이 있을 때마다 기웃거려 보곤 했다.

 

작은 물고기 한 마리의 죽음에도 아이들이 진심으로 슬퍼할 줄 알고

또 그런 이야기를 학교통신문 한 켠에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엔젤 군의 이야기'를 전하는 선생님을 보며

또 작은 희망을 느낀다.

 

원전 사고는 분명 인간이 스스로 만든 재앙이지만,

그걸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 2년 전 동북 대지진 때도 그랬지만, 이번 방사능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의 언론보도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장의 사실을 제대로 알리기보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꼼짝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요.

원전이나 환경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제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실시간으로 겪고 있습니다. 무작정 불안해하고 걱정만 하기보다, 현실적인 대안들을 다함께 찾아가고 한사람 한사람이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하고 나누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앞에는 <밀양 송전탑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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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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