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카 앞에서 찰칵! » 스포츠카 앞에서 찰칵!

 

 

한 달 전 일이다. 주말에 발생기사보다는 재밌는 읽을거리에 방점을 둔 <한겨레> 주말판이 선을 보이면서 금요일 근무부담이 줄게 됐고, 각 팀별로 돌아가면서 금요일 휴무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부 법조팀에서도 격주로 토, 일요일을 쉬는 팀원 중에 1명이 금요일까지 붙여서 한 달에 한 번은 3일을 쉬기로 했다. 내가 첫 대상자였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9월부터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9월 하순, 이국철 에스엘에스그룹 회장이 정권실세들이 관련된 의혹을 폭로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11월 초에는 에스케이그룹을 압수수색하면서 총수 일가의 횡령 의혹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12월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수사로 한 달이 금방 지나갔다. 해가 바뀌어서는 고승덕 의원의 고백으로 시작된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 수사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이 굵직굵직한 사건 수사에 열을 올림에 따라, 검찰 출입기자인 나도 같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게 찾아온 ‘3일 휴가’는 의미가 컸다. 본능적으로야 금요일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번잡한 주말을 피해 세 식구가 놀이공원에서 눈썰매라도 타려는 생각에 아내에게 일단 그날 연차를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 일도 않고 아무 생각도 않고 집에서 하루 푹 쉬면 될 것 같았다.

 

달콤한 휴식 같을 그날이 밝았다. 내게 휴일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일어나 녀석의 아침을 챙겼다. 그런데 잠옷차림의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빠, 왜 양복 안 입어?”
“응, 아빠 오늘 쉬는 날이야.”
“그래? 그럼 나 어린이집 안 가고 아빠랑 놀래.”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이놈아, 네 아비가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아무리 어리다지만 오랜만에 쉬려는 아빠에게 그게 할 소리냐. 나는 녀석의 말도 안되는 ‘생떼’에 근엄한 표정으로 바로 일침을 놓았다.
“야! 그냥 어린이집 가.”
녀석은 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아빠가 오늘 쉬는데 나 어린이집 가래”라며 고자질을 했다. 나는 속으로 아내가 “아빠 그냥 쉬게 해야지. 어린이집 하루만 갔다 오면 내일 쉬는데 뭐... 그냥 어린이집 가자”며 녀석을 달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아내는 나를 몰아붙였다.
“애한테 친절하게 설명하면 되지. 그렇게 쏘아붙일 게 뭐야? 그리고 평소에 아빠 얼굴 보기도 힘든데 오늘 하루 같이 있으면 안 되나? 요즘 새학기 준비하면서 통합교육 하기 때문에 얘도 스트레스 받고 있단 말이야.”
“뭐라고? 그게 말이 돼?”
서로에 대한 서운함은 금세 노여움으로 변했다. 그리고 ‘애 앞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애가 보는 앞에서 크게 싸웠다. 결국 아내와 아이는 씩씩거리며 집을 나섰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점심때가 지나서 배가 고파올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웠다. ‘김태규 기자’를 찾는 전화가 한두 통 걸려왔지만 누운 채로 그냥 받았다. 실로 오랜 만에 경험하는 ‘무위()’의 시간은 달콤했다. 
그러나 맘은 불편했다. 내가 하루 쉬는 평일에, 어차피 다니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안 보내고 집에 있게 하겠다는 아내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당신, 너무 일에만 파묻혀있는 거 같으니 혼자서 여행이라도 다녀와”라고 말했던 사람인데...

 

그 일로 우리 부부는 며칠 간 냉전을 치렀다. 그러고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최일도 목사가 쓴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라는 책이었다. 가족들과의 갈등, 그리고 이를 해결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담은 책이었다. 아내는 이 책을 읽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적고 그 느낌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그 책에는 자신의 일에 미쳐 사는 한 남자가 겪었던 시행착오, 그리고 구체적인 해결방책이 담겨있었다. 경험에서 나오는 그의 가르침 중에는 알고 있는 것도 있었고 모르고 있는 것도 있었다. 나는 ‘중요 부분’을 메모해가며 알고 있는 것은 다시 상기시켰고 몰랐던 것은 가슴 속에 새겼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나를 무조건 이해해줄 거라는 오해’라는 챕터였다. 최 목사의 막내딸아이가 겨우 첫돌을 넘겼을 어느 추운 겨울밤, 그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역자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정을 지난 시각에 아이는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최 목사의 부인은 남편을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부인은 구급차를 불러 아이를 병원 응급실에 데리고 갔지만 의료진은 매우 불친절하게 이들을 맞았다고 했다. 아이는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병원 의사는 차갑게 “수납부터 하고 오라”고 했단다. 소아 변비라는 진단을 한 뒤에 의사와 수련의, 간호사가 아이를 딱딱한 간이침대에 눕혀놓고는 관장을 하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아이를 제대로 붙잡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제발 도와달라”는 부인의 호소에 의사는 “여기 관광하러 오셨나요”라며 면박을 줬다. 관장을 한 뒤에 배변을 해야 하는데 아기용 변기도 갖다주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빼고 오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아이 항문을 틀어막고 화장실에서 대변을 빼고온 부인에게 의료진이 던진 마지막 몰염치한 한 마디.
“침대에 변이 묻었으니 그거 닦아놓고 가세요.”
부인이 아픈 아이를 데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갖은 수모를 다 겪은 뒤에야 최 목사가 병원에 도착했다고 한다. 부인은 최 목사에게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
“왜 내가 힘들 때 당신은 항상 내 곁에 없는 거죠? 나뿐만 아니라 애들이 힘들 때도 당신은 늘 다른 데 있었어요! 도대체 가족들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다 해결된 다음에 와서 힘들겠다고 말만 하면 뭘 해요? 난 그 말도 이젠 입에 발린 말처럼 들려요! 믿지 못하겠다구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하면서 왜 식구들한테는 관심이 없는 거죠?”

 

난 책에 적혀있는 최 목사 부인의 말이 마치 아내가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저녁약속 자리가 잦은 나에게 아내는 “왜 이렇게 술자리가 많냐, 일찍 들어오라”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아내의 ‘통큰 이해’를 고마워하면서 집에 전화 한 통 거는 일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아내는 간혹 “미혼모가 혼자서 애를 키우는 느낌”이라며 타박을 했다. 나는 내 일을 이해하는 아내가, 저런 ‘투정’을 부리는 게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우리 가족을 생각하는지 잘 알면서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었다. ‘나를 무조건 이해해줄 거라는 오해’였다.
최 목사는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가족이 힘들 때마다 늘상 곁에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이야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나는 가족들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가장이었다. 가족이니까, 누구보다 가까이 있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가족이니까 나를 십분 이해해 주리라던 믿음은 혼자만의 오해였다. 오히려 가족일수록 더 섬세한 보살핌과 자상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나는 아내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이 문장을 적고 내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야. 이 에피소드를 접하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지. 역사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다음날 성적표를 받아드는 기자로서, 매일 아침식사를 챙기고 뒷정리까지 하는, 그리고 육아일기를 썼을 정도로 육아에 관심이 많은 나는 정말 ‘대한민국 상위권 아빠’라고 자부했거든. 아침식사 도맡고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성의를 보였으니까, 실제로도 난 아이를 좋아하니까, 더 이상의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을 해왔던 거지.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많이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 다시 명심하게 되었어. 자만하지 않고 잊지 않을게.”

 

이후로 난 밖에서 저녁자리가 있어도 잊지 않고 꼭 전화를 걸어 아내와 녀석과 통화했다. 그리고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이번 달 금요일 휴무를 기다렸다. 드디어 지난 금요일, 녀석과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함께 갔다. 일부러 자가용을 놓고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탔다. 2호선 승차가 처음인 녀석은 더욱 즐거워했다. 48개월 미만 유아는 아쿠아리움 관람료 무료. 평일 오전에 한적하게 갖가지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녀석은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고 나오는 길에 전시돼있던 스포츠카도 타봤다. 성윤아, 아빠의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느냐... 잊지 못할 아빠와의 여행이었길 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태그
첨부
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54474/b27/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2105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의 방학은 엄마의 특별근무!! imagefile [2] 신순화 2011-12-26 70170
2104 [김연희의 태평육아] 대충 키우는 ‘태평육아’, 대충 잘 큰다 imagefile [9] 김연희 2011-10-13 70074
2103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하루만에 젖떼기 성공! 시원섭섭한 엄마 마음 imagefile [4] 양선아 2011-10-12 69810
2102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에서 며느리살이,이보다 더 가벼울 수 없다 imagefile [7] 윤영희 2013-03-18 68474
» [김태규 기자의 짬짬육아 시즌2]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오해' imagefile [7] 김태규 2012-03-12 67405
2100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30편] 2013년 베이비트리의 우~아한 송년회 후기 imagefile [7] 지호엄마 2013-12-13 67314
2099 [임지선 기자의 곤란해도 괜찮아] 알고보니 순풍녀 imagefile [6] 임지선 2012-04-04 65878
2098 [김외현 기자의 21세기 신남성] 남편이 본 아내의 임신 - (1)임부복 imagefile [6] 김외현 2012-04-24 64465
209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여섯 살 둘째, 잠자리 독립하다!! imagefile [5] 신순화 2012-08-28 63750
2096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 위태로운 아이들, 어떻게 살려낼까 [4] 안정숙 2016-08-03 63257
2095 [김연희의 태평육아] 떼다 imagefile [3] 김연희 2011-12-21 62362
209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10년만의 가족 여행, 여친때문에 안 간다고?? imagefile [11] 신순화 2012-06-11 61253
2093 [최형주의 젖 이야기] 지글지글 끓는 젖 imagefile [5] 최형주 2013-10-25 61133
2092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기막혔던 뽀뇨의 첫 이사 imagefile [2] 홍창욱 2011-12-26 60976
2091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둘째 아이를 갖기 위한 필수 조건 imagefile 양선아 2010-05-30 60632
2090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13살 아들, 죽음을 돌보다 imagefile [4] 신순화 2015-09-23 59909
2089 [동글아빠의 육아카툰] [육아카툰] 훼이크 imagefile [1] 윤아저씨 2011-09-01 59751
2088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글을 열며... imagefile 신순화 2010-04-23 59675
2087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젖떼고 첫 맥주, 나보고 정신 나갔다고? imagefile [7] 양선아 2011-10-19 59624
2086 [김연희의 태평육아] 왜 하의실종 종결자가 되었나? imagefile [3] 김연희 2011-11-02 59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