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기 아까운 화창한 가을 어느 주말,
이런 행사가 있는 곳으로 나들이가는 건 어떨까?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문화와 놀이가 있는 곳.
아이들에겐 안전하고 친숙한 공간이며 어른들은 만남과 수다를 나눌 수 있는 곳.
적은 돈으로 쇼핑이 가능하고, 싼값으로 간단한 점심과 간식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도쿄 근교에 있는 한 유치원의 바자회 풍경.
빙수, 팝콘, 음료수 등을 임원을 맡은 엄마들이 직접 만들고 있다>
바로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바자회가 그런 곳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대부분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학부모회 주최로 바자회를 연다.
지역이나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아이들의 가정에서 기부한 기증품과
홈메이드 작품 등의 판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코너와 과자, 장난감 판매코너,
주먹밥, 빵, 야키소바, 음료수, 빙수, 팝콘 등의 음식 판매 코너를 마련한다.
가을에 있는 이 행사를 위해 봄부터 학부모회에서는 바자회 임원단을 꾸리고
전체 임원이 정해지고 나면, 각 코너별로 조가 정해져 봄부터 가을까지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해간다.
아이들의 각 가정에서 더 이상 필요없는 물건을 기부해서 모아진 기증품 코너는
책/CD, DVD/장난감/옷/식기/세제/식품 등의 각종생활용품을 임원들이 수거해, 각각의 물건에
가격표를 붙여 진열한다.(새것이냐 중고냐에 따라 가격차이가 나지만, 시중 판매가격에 비하면
놀랄만큼 싼 가격이 대부분이다)
이런 식의 바자회가 오랜 세월동안 일상화되어있어, 일본 가정에서는 장난감 상자같은 것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두었다가 이런 바자회가 있을 때 다시 포장해서 내 놓는다.
운이 좋으면 새것에 가까운 장난감이나 생활용품을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값으로 살 수 있는
이 기회를 학부모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이용하느라, 아침부터 줄을 서기도 한다.
일찍 가는 사람이 좋은 물건을 손에 넣기도 하지만, 이 바자회의 매력은 마지막에 있기도 한데
마칠 시간이 가까워지면 이 싼 가격에 다시 반액할인 - 그러고도 안 팔리면 무조건 100원 -
그러고도 남은 물건은 공짜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어느 코너보다 인기있는 곳은 홈메이드 작품코너!
일종의 재능기부인 셈인데, 손재주가 있는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홈메이드
물건을 만들어 바자회에 기증하면, 거기에 적당한 가격을 붙여 판매하는 곳이다.
요즘은 겨울을 대비해 천마스크가 특히 인기있고, 여자아이들의 헤어핀, 방울 소품이나
천으로 만든 가방, 실내화 주머니 .. 이것 역시 시중 가격에 비하면 엄청 싸게 살 수 있다.
초등 여자아이들은 친구들끼리 몰려가 구경하며 그동안 모은 용돈으로 쇼핑하는 걸
엄청 즐기는데, 엄마들도 아이들이 바자회에서 쓰는 돈은 그리 많지도 않고
어차피 여기서 얻어진 수익금은 아이들을 위해 다시 쓰여지기 때문에 허용하는 편이다.
올 가을엔 동네에 있는 다른 유치원이나 학교 바자회에도 참석해보았는데,
조금씩 색다른 코너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트리같은 나무에 엄마들이 손수 만든 작은 천가방을 하나 골라 가방안에
과자를 담아 가져가는데 100엔이 든다. 과자도 그냥 담는 것이 아니라
큰 냄비 안에 가득 담긴 과자를 국자로 조심스럽게 떠서(?) 담는 식인데,
작은 물건을 하나 사는 일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를 적용하니
유아들에게 무척 인기있었다. 과자를 다 먹고 난 다음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붙인
이 작은 가방은 몇 번이고 재활용해서 쓰여질 수 있으니, 좋은 아이디어같았다.
이런 바자회 내용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들도 엄마들이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게 된다.
<초등학교의 바자회 무료 코너. 사진 왼쪽에 나비모양의 연이 있다.
마을 할아버지께서 자원봉사로 아이들에게 연만들기를 가르쳐주시고 계신데
바자회는 학부모 뿐 아니라 마을 자치회의 어른들도 참여하시는 경우가 많다.>
유치원의 바자회가 아기자기한 편이라면,
학생수가 많고 규모가 좀 더 큰 초등학교 바자회에는 아이들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코너가 좀 더 많다. 퀴즈대회, 풍선아트, 재활용품을 이용한 연만들기, 나뭇가지나 도토리 등을
이용한 리스 만들기 등. 부모와 꼭 함께 참석하는 유아들에 비해 초등생들은 이날 하루
친구들끼리 약속해서 학교에서 늘 하던 공부가 아닌 쇼핑을 하고 음식을 사 먹는다.
소박하지만, 이날 하루만큼은 아이들이 익숙한 학교공간에서 쇼핑과 식사와 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른들의 준비와 보호 아래서.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이 바자회 임원을 3번이나 경험했는데
일본의 유치원이나 학교는 특정한 엄마만 임원을 맡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씩은
참여하게끔 되어있다. 처음에는 '아, 왜 이리 엄마를 귀찮게 하나'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이
오래 지나다보니,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학부모회가 주체가 되어 독자적으로 운영해온
일본의 바자회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너무 즐기고 좋아한다는 것이 부모로서는 가장 기쁜 일이다.
준비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쌀쌀해진 가을날 바자회가 끝나갈 무렵 음식판매를 맡은 엄마들이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를 다른 임원 엄마들이 뒷정리를 하는 교실로 배달하는 풍경은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고생한 만큼 친해지고 뿌듯한 보람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10월 한달은 주말마다 근처 유치원과 학교 바자회가 있어, 토요일마다 잘 보냈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넓은 곳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먹고 마시고 놀며,
어른들은 적은 돈으로도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고르는 재미가 있어 즐겁다.
총 4군데의 바자회를 다녀오니, 올해도 저렴하게 살림장만을 많이 했다.
비싸다해도 1,2천원을 넘지않는 그림책, 장난감, 새 수건, 귀여운 모양의 키친 타이머...
무엇보다 올해의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빨강머리 앤> 접시!
딸아이가 여름방학 내내 책과 애니메이션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로 빠져 있었던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접시. 그것도 한번도 쓰지않은 새 것임에도 가격은 단돈 50엔.
싼 가격도 그렇지만, 이런 물건은 요즘 시중에서 구하기 힘들기에 더 가치가 있다.
아마 오랫동안 어느 집 부엌 수납장에 쓰지않고 들어있던 것이 이번 바자회를 통해 나왔으리라.
나에게 필요없는 물건이 누군가에겐 필요할 수 있다는 것,
버려질 물건이 다시 재활용된다는 것, 부모들의 바자회 노동 기부로 거둬진 돈이
다시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다는 거, 요즘같은 불황과 저성장 시대라서 더 의미있는 것 같다.
작년까진 엄마 뒤만 따라다니더니, 올해 친구들끼리 해본 바자회 쇼핑재미에 제대로 빠진 딸은
내년엔 교문을 열기도 전에 줄을 서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나도 내년부턴 동네 학교/유치원 바자회 정보를 모두 입수해서 달력에 적어두고
제대로 살림장만 한번 해보리라! 마음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