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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남편은 대체로 가정적인 편이라 할 수 있다.

아빠가 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은 만큼

집안일과 육아의 몇몇 부분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라 여기며 잘 도와준다.

 

시간이 나는대로 둘째 유치원에도 데려다주고

아이들이 아플 때 

평균 한, 두 시간씩은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병원방문도 자주 맡아주고

가끔이긴 하지만, 주말 반나절 정도는 내가 혼자 쉬거나 밀린 일을 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차에 태워 셋이서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준다.

그런 날은 나간 김에 저녁에 시댁에 들러 아이들과 저녁까지 얻어먹고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황홀한 날이 있다.

 

놀이에 늘 목말라하는 별난 아이 둘과 하루종일 밖에서 지내다

돌아온 그의 두 손엔 시댁에서 얻어온 식량 보따리가 주렁주렁...

신선한 유기농 달걀에 가까운 밭에서 수확한지 얼마 안되는 채소들과

시어머님의 홈메이드 일본 가정식(규동, 고로케, 초밥...)들이 가득하다.

 

아직 따끈한 온기를 담은 반찬통을 열어 하나씩 맛보며

살림과 육아에 찌들어 신경쇠약 직전이었던 이 아줌마는

이날만큼은 남편이 백마탄 아저씨로 보이고도 남는다.

 

또 남편은 심하게 피곤하지만 않으면 아이들과 친구처럼 참 잘 놀아준다.

취미나 관심사도 다양해서

딸아이와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아들과는 두 돌 겨우 됐을 무렵부터 단 둘이서 기차박물관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가끔 남편이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부엌에서 밥하며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푸하하- 하고 웃음이 날 만큼 재밌게 들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아빠의 육아로 채워지는 걸 자주 실감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때를 제외한 남편은 육아 파트너로서

한숨이 저절로 나는 부분이 너무 많은 남자다.

빨래를 널면 돌돌 말린 양말을 펴지도 않고 그대로 너는게 주특기인데

저녁무렵에 내가 빨래를 걷으려고 베란다에 나가면

양말들이 죄다 주먹쥔 채로 널려있어 기함을 하기를 벌써 몇 년째인지.

 

청소나 정리정돈, 자잘한 집안일은 처음부터 싫어했지만

그래도 몇 개 안되는 그릇들을 씻느라 물은 계속 틀어놓은 채

1시간을 부엌에 서 있지를 않나..

식구들 중에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밥솥을 꺼내 물에 담그는 것도 귀찮아

딱 한 숟갈만큼의 밥만 남기고 그대로 뚜껑을 닫는.. 아침까지 그 한 숟갈 양의

밥을 데우느라 뜨겁게 달궈진 큰 밥솥을 발견하고 꺼내 씻으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리라 믿고 싶다.

 

근데 이런 모습도 요즘은 보기가 힘든 게

둘째가 어느 정도 크면서 그나마 흉내내는 듯 하던 집안일도

모조리 내 몫이 되어가고 있다.

둘째는 아들이라 배변훈련은 완전 맡겨도 되겠다 싶어 잔뜩 기대했더니

찬찬히 가르치는 과정없이 처음부터 스파르타 식으로

"왜 제대로 못하는거야!"며 다그치니 아이가 아빠랑 화장실 가기를 거부해

누나보다 훨씬 길고 지루한 배변훈련의 여정은 결국

온전히 내 몫이 되고 말았다.

 

근데 뭐.

10년 넘게 살다보면 서로의 몇 가지 단점 정도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게 된다.

여전히 똑같은 주제로 티격태격 싸우긴 하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인정하고 그것만 보려고 노력하기도 하는데

엄마로서 아내로서 나도 장점만큼 단점이 지나칠만큼 분명한 사람이고

세월이 흘러도 더 심해만 가는 나의 폭풍 잔소리가

남편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진 않는지, 반성도 자주 하게 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남편도 이젠 마흔을 훌쩍 넘었으니 똑같은 회사일도 전보다 버겁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예전보다 더 피곤할 수도 있겠다 싶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낸 뒤라

긴장이 풀려 요즘 더 마냥 쉬고 싶기만 한 건 아닐까 ...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한가지 깨닫게 된 건, 내가 너무 대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단순하게 서로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저녁 식탁에서 한잔하며

즐겁게 풀어버릴 수도 있는거 아닐까.

남편이 오늘 열받은 회사 동료나 상사 얘기 들어주고

나도 오늘 열받은 유치원 엄마 흉보며

남편이 그토록 사랑하는 맥주와 맛나는 안주들 먹으며

은근슬쩍 아빠로서의 육아를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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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맥주값이 좀 들더라도 냉장고 안을 영국의 어느 퍼브처럼

종류대로 갖춰두고 남편에게 힐링저녁을 선물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층 혈기왕성해진 5살 아들을 키우기 위해선 아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니까

어쩔 수 없다.

나의 이런 고민과 노력의 이면에는 얼른 남편에게 아이들을 떠맡기고

어떻하면 또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사실.

이거 우리 남편이 알면 절대 안 된다.

아! 그가 이만큼의 한국어까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여보 미안!

암튼 요즘 날씨도 무더운데 오늘 일찍 와서 같이 한잔해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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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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