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개인 블로그에 쓴 어느 글에 낯선 분의 덧글이 달렸다. 

당신 아이도 케이티와 같은 병, KT 진단을 받았다며 우리가 어느 병원에 다니는지 알고 싶으니 연락을 달라셨다. 아마 그 글 하나만 보시고 급히 덧글을 다셨던 모양이다. 내가 미국 체류 중인 걸 모르시는 것 같았다. '미국 체류 중이라 시차 문제 때문에 전화를 드리기가 쉽지 않으니 이메일로 연락을 주시라'고 답글을 달아 놓고서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마음이 상했었다. 나는 케이티 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KT 관련 진료 일지를 자세히 남겨두고 있다. 워낙 병원 갈 일이 많아 자체 기록용으로 쓰는 것이지만, 혹시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단 생각에 좀 더 공들여 쓸 때도 있다. 블로그를 쓴 지 5년이 넘어가다 보니 글을 자세히 읽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내게 무턱대고 메일을 보내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가 싶어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거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희소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결국 하루 뒤, 남겨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저, 제 블로그에 덧글 주신 것 보고 연락드려요."

"아이고, 전화 주실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아이 엄마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 내 글을 몇 개 더 읽다보니 내가 미국 체류 중인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전화 연락은 당연히 오지 않을 줄 알았단다. 그렇게 시작된 전화 통화. 엄마는 두서 없이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아는대로 답변해주기 바빴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 엄마는 울다가, 푸념하다가, 다시 질문하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근데, 이거 거기선 원인이 뭐래요? 여긴 유전은 아니라는데, 정말 아닌 것 맞아요?"


내가 여기서 듣기로도, KT는 유전 질환이 아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염색체에 특정 징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연구 결과까지는 본 적이 있지만,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치료법도 있을 수 없는, 수많은 희소질환 중 하나다. 아이 엄마는 내게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물었고, 그러면서 흐느꼈다. 


"내가 노산이라, 엄마가 뭔가 잘못해서, 내가 못나서 그런 것 같아서요."


이 말을 듣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이게 어째서 엄마 잘못일 수 있단 말인가. 노산이어서 누구보다 더 신경쓰였을 임신 기간, 얼마나 정성을 쏟고 애틋해하며 뱃속 아이를 키웠을 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게 엄마 탓인가. 누구의 탓도 아닌데, 왜 엄마는 '내 탓인 것 같아' 저렇게 울며 미안해해야 하는가. 케이티의 병에 대해 '엄마 탓'이라기보단 그건 그냥 '아이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이가 이 운명을 최대한 행복하게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돕는 거라고 생각하는 내가 오히려 미안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같이 실컷 울고 같이 기운 내게 만들어서 그 무겁고 안타까운 죄책감 탈탈 털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니에요. 엄마 탓 아니에요. 게다가 저는 이제 서른, 노산도 아니었고 임신 내내 건강했고 즐거웠어요. 그런데 제 아이도 이렇잖아요. 우리 탓 아니에요. 엄마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아이 엄마는 내 글 덕분에 용기를 갖게 됐다고 했다. 내가 아이에게 쏟는 정성에 감동했고, 초음파로 이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아이를 낳은 내 결심에 감동했다고 했다. 다리 크기가 다른 아이를 위해 직접 아이 바지를 만들어 입히고, 웃으며 의욕적으로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진료 일지가 앞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고마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쓰는 글로 인해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앞으로는 조금 더 신경 써서 써야지, 생각했다.  


통화를 시작할 때 이미 한국은 밤 늦은 시간이었던지라 통화를 오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리고, "궁금한 게 있으시거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메일을 달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심 얼른 이메일로 다시 연락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주일이 넘었지만 아직 메일이 오지 않고 있다. 혹시 이메일이 오면 첨부해서 보내려고 장난꾸러기로 잘 살아가고 있는, 아픈 다리가 다 드러난 우리 케이티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블로그에는 다리가 다 드러난 사진을 올린 적이 없다. 양가 식구들이 보시기에 걱정거리 일 수도 있고, 특히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님은 아직 아이 상태를 자세히 아시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제 다리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는,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이 제 다리를 보고 갸우뚱 거려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케이티. 더운 여름 날 그저 기저귀만 차고서는 두 다리를 한껏 뻗어 책상에 올려 놓고 노는, 그 다리를 감출 생각 따위 없는 케이티와 나를 보고 나면 그 아이의 엄마도 조금은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까. 발이 아픈 날을 빼고는 늘 깔깔 웃으며 걸어다니는 케이티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아이의 엄마도 조금 더 희망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당당히 얘기한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태어난 건, 엄마들 잘못이 아니라고. 그건 그저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운명이란 게 있듯, 이 아이들의 운명인 거라고. 우리는 이 아이들이 덜 불편하게,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면 되는 거라고. 케이티(KT)여도 괜찮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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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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