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77407_P_0.JPG » 한겨레 자료 사진


결혼 4 주년이던 5 28일 아침, 그가 7주간의 일정으로 혼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4년 전 나와 함께 여기 들어온 이후,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한달 월급의 거의 전부를 털어야 한 사람 비행기값을 댈 수 있는 형편에 세 식구가 다 같이 한국엘 가는 건 불가능했다매번 여름학기에도 학부 강의를 맡아 월급을 벌어야 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학과에서 남편에게 강의를 면제해 주고도 월급은 그대로 주는 특수 장학금을 쥐어 준 덕분에 차라리 나는 아이와 여기 머무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남편의 이번 한국행은 다음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쓰게 될 박사논문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운동의 매커니즘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 남편은 박사 논문으로 한국의 사회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그 시기에 어떤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데 대중의 집단적 경험과 그 기억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사회운동에 관심 많은 나로서도 남편의 논문 주제는 제법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 두 살 반짜리 에너자이저 아들과 나를 두고 혼자 한국엘 가다니!! 왜 하필 논문 주제를 그런 걸로 잡아서는 말이야!


게다가 출국 날짜는 또 왜 하필 결혼기념일인가남편에겐 농담조로 얘기했지만, 사실 남편 출국일 일주일쯤 전부터 나는 꽤 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갑자기 더 많아진 불의의 비행기 사고 때문인지, 하필 결혼기념일에 남편 혼자 비행기에 오르게 된 것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꼭 그런 사고가 나면 누군가는 결혼기념일에, 또 누군가는 생일에 운명을 달리하곤 하던데, 혹시 우리가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하고 밤마다 불안해했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그런 쪽 으로 가 있어서 꿈에 연락이 끊어진 옛날 친구를 보거나 하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친구의 소식을 듣기도 해서 특히 꿈에 민감하다. 그런데 남편의 출국일을 2, 3일 앞두고 이틀 밤 연달아 이가 빠지는 꿈을 꾸는 바람에 불안감은 더더욱 증폭되고 있었다괜히 꿈 얘기를 하면 서로 더 신경쓰일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않고 남편을 보냈다. 둘 다 스마트폰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남편이 비행하고 경유지를 거치는 그 시간 내내 나는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남편은 집을 떠난 지 약 29시간 만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하여 무사히(?!) 시작되었다. 무려 7주간의 쓸쓸한 독박 육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사실 이 글의 원래 제목은 아빠 없는 하늘 아래가 될 예정이었는데, 삼 사일 지내면서 보니 남편이 없어서 힘든 건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다. 오히려 아이는 아빠의 부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까지 아빠랑 신나게 놀면서 계속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아이는 아빠를 잘 찾지 않는다. 오히려 아빠 멀리멀리 (갔어)” , “아빠 비행기 타하면서 아빠가 나중에 나중에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엄마 혼자 고생하는 줄 알아서인지 오히려 평소보다 떼도 덜 쓰고, 예쁜 짓도 많이 한다. 양치도 샤워도 잘 하고, 밤에 잠자리에 누워 내 입에 볼에 뽀뽀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를 하루 종일 혼자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오히려 힘든 건 내 생활을 나눌 사람, 밥을 같이 먹을 사람, 내 마음과 내 생각, 내 수다를 받아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온다. 어떤 면에서 지금 내 생활은 그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다. 지금 내겐 나와 먹을 맛있는 밥 한끼 요리해 줄 사람, 아이 밤잠 재워놓고 맥주 한 잔 나누며 예능 한 편, 영화 한 편 같이 볼 사람이 없다. 아이가 낮잠에 들면 나 혼자 먹을 맛 없는 국과 카레와 반찬--나는 요리를 못한다. 오히려 남편이 요리를 더 즐겨하고, 잘 한다--을 한 냄비씩, 한 접시씩 미리 해 두고 이틀 삼일 똑같은 식사를 해야 하고, 아이가 밤잠을 잘 땐 나도 그 옆에서 같이 잠든다. 지금 내겐 내가 읽은 책과 내가 쓸 글에 대해 두서 없이 이야기를 던져대도 자기 생각을 더해 이리저리 꿰어 봐 줄 사람이 없다. 아이에게 책 이야기, 글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아이 책이나 같이 읽고 아이가 덜 끝낸 말에 자를 붙여 문장으로 완성하는 일에나 더 관심을 쏟을 뿐이다.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생활이 참으로 무료해진다아무리 아이가 덜 힘들게 굴고, 더 예쁘게 굴어도 이 예쁜 악동을 같이 볼 사람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 남편 없는 하늘 아래 내 마음을 아는지, 어제 오늘 이곳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이따 바람이 좀 자면, 아이를 데리고 장이나 보러 가야겠다. 바나나 한 송이, 오렌지 한 봉지 사 들고 오는 그 길마저도 아마 쓸쓸한 지금 내겐 더욱 멀게 느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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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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