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를 뱃속에 품고 있던 기간 중에 내가 가장 활발히 한 활동은 태교도 뭣도 아닌, '운동'이었다. 신체활동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 참여 활동으로서의 운동, 액티비즘(Activism)말이다. 그럼 한국에서도 운동 좀 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상당히 소심하고 모범생스러운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도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로 소문난 아이여서 더운 날 땡볕 아래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면서도 '선생님이 여기 가만 있으랬다'며 정말로 발 한 번 옴짝달싹 하지 않고 서 있곤 했다.(아, 이 대목에서 다시 떠오른다. '선실에 가만 있으라'는 방송에 '네-'하고 답하던,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 아이들이...)


그런 태도로 이십 년을 넘게 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살다가 사회에 나가면 결국 어떤 불의에도, 불이익에도 맞서지 못하고 순응하며 남의 배나 불려주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이미 부를 대로 부른 그 남의 배 불려주고, 나 먹고 살 돈 약간 얻어 인간으로서 품위 유지 하며 살 때, 다른 누군가는 아프고 다치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로 노동자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주노동자들,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 하청업체 노동자들, 철거지역 사람들.. 그러다 보니 그게 '남의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기름밥 먹으며 기계 돌려 숟가락 젓가락 만드는 우리 아버지, 식당 일, 요양원 일 하며 남의 뒤치닥꺼리 하는 우리 엄마, 학원에서 목터져라 수업하는 나. 우리 모두가 노동자 아니던가. 


그렇게 조금씩 내가 사는 세상을 알아가던 중, 3년 반 동안 나와 연애한 남자가 혼자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고--당시 나도 영문학으로 박사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바다 건너 떠나는 걸 나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뒤늦게서야 '사회의식'이란 것에 눈뜨게 된 나에게 대학 재학 때부터 해 온 학원 강사/과외 강사일은 나를 더더욱 옭아매던 차였다. 박사 과정 공부가 아니더라도 뭔가 다른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 남자와 초스피드로 결혼을 하고 '유학생 배우자' 신분으로 미국에 왔다. 


때는 마침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이 번져가던 때였다. 그리고 우리가 적을 두고 있는 이 곳, 퍼듀 대학교 내에서도 '아큐파이 퍼듀'라는 이름으로 반자본/친노동 노선의, 1:99의 세계 질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소규모로 조직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시작되었다. 내 최초의 '운동'이. 


매주 아큐파이 퍼듀 모임에 나가 학부생/대학원생/교직원/지역 주민들의 열띤 토론을 들었다. 그들과 주 법원 앞에 나가 피켓 들고 시위도 했다.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자본주의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생겼고, 그 후에도 모임에 계속 나갔다. 아큐파이 운동이 식어갈 때에도 아큐파이 퍼듀 모임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과 또다른 모임을 계속했다. 그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은 뱃속의 내 아이를 가리켜 '레드 다이어퍼'(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부모의 아기)라고 부르며 놀렸다. 정치적이려고, 급진적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아는 것도, 경험도, 말빨도 부족해 내 맘처럼 잘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운동'으로 태교를 한, 흔치 않은 엄마가 되었다. 

임신 5개월 무렵에는 퍼듀 대학 차기 총장 임명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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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출산후에는 4개월 된 아이를 슬링에 싸매고 남편과 함께 학내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주의 관련 사건에 대응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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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몰라 망설이고 있다. 또 지난 번 내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몇 분이 쓰신 것 처럼, 아이들에게,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공감하는 법'을 어떻게 심어줘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운동' 역시 그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는데,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었다. 


첫째,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해 보기. 처음 여기 와서 아큐파이 퍼듀 운동에 참여할 때 나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여기 학생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지?' '나는 외국인인데?' '나는 여기 잠깐 머무는건데?' '나는 이제 임산부인데?' 등등, 기존의 '나'를 규정하는 말들이 내 활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의심과 의문을 풀기 위해 내가 택한 것은 그 모든 말들을 '나는 ~이지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 학생이 아니지만' '나는 외국인이지만' '나는 여기 잠깐 머무는 거지만' '나는 임산부이지만' 이라고 말을 바꿔 보니 내 주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둘째, 어떤 형태로든 직접 행동하기.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주변 사람들과 토론을,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글을, 걷기를 좋아한다면 행진을,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면 토론회와 강연회 참석을 하면 된다. 나는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라 글쓰기를 택했고, 소심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힘을 더 받을 수 있는 탓에 피켓 들고 행진하기를 즐긴다. 앞으로도 아이와, 남편과 함께 이러저러한 '운동'에 동참할 생각이다. 뱃속에서부터 엄마가 토론하고 발표하고 글쓰고 행진하는 걸 봐 왔으니 아이도 조금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물론 아이가 커 가면 그에 맞는 설명도 덧붙여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행동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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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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