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나는 유난히 힘겨운 신년 맞이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어처구니 없는 일은 내 존재를 통째로 뒤집어 흔들어대고 있었고, 그 일 때문에 사람에 대한 믿음, 세상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사는 게 허무하고 황망하기만 했다. 무얼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의사들은 아이의 다리를 수술해보자고 제안해 왔고, 다른 병원에 문의를 넣느라 이리저리 전화를 넣고 자료를 모으는 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바쁘고 신경 쓸 일이 많은 상황에서도 나는 앞의 일 때문에 때때로 무너져 내렸다. 가히 내 인생 최대의 위기라 할 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이메일 하나를 전달해줬다. 평소 한국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나를 아는 남편이 그래도 이건 자기가 좋아하는 거니까 혹시나 해서하는 말을 붙여 전달해 준 이메일 속에는 이 곳 캠퍼스에서 사물놀이 팀을 꾸려보고 싶다는 어느 학생의 연락처가 담겨 있었다. , ? 사물놀이라고?! 아주 잠깐의 망설임 뒤, 곧장 그 학생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몇 주 뒤, 캠퍼스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팀원들을 만났다. 내 아이보다 훌쩍 큰, 말간 얼굴의 열 아홉 청년이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 온 내 아이를 보고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 애기가 귀엽네요.”

 

그의 말간 얼굴은, 십 수년 전 함께 악을 치며 놀던 친구들, 선배, 후배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우연히 장구의 매력에 빠져 고등학교 때 풍물패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당시 우리 학교를 포함해 네, 다섯 학교의 풍물패가 모여 연합을 이루고 있어 연합 동아리 활동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했다. 체육대회, 학교 축제 같은 교내 행사 때는 각자 교내 패 활동을 하면서 공연을 올리고, 주말에는 장구며 북을 어깨에 걸쳐 메고 시내 연습실까지 우르르 몰려가 몇 시간씩 놀며 연습하며 보내는 시간이 참 많았다. 상모 돌리기를 배우겠다고 공설운동장 한 켠에 있는 어느 무형문화재 선생님(!) 연구소를 찾아가 배우기도 하고, 축제 공연 연습을 하느라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학교 체육관에 모여 뛰고 굴렀다.

 

체구가 작아 장구를 메고 선반(무대에 앉아 치는 사물놀이와 달리 악기를 메고/들고 뛰어 다니며 악을 치는 걸 선반이라고 한다)을 뛰면 엄마가 어이구 지 몸만한 장구를 우찌 메고 뛴다고 저러누. 니가 장구에 매달려 끌려가는 것 같다!” 하고 타박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악 치는 게 참 좋았다. 하지만 원체 성격이 소심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고, 대학 입시의 부담감에 눌려 결국 동아리 활동을 중도 포기했다. 그 당시 나는 무조건 (in) 서울대학에 가야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는데, 동아리 활동을 계속 하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으리란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던 거다. 특히 겨울 방학 때 정기 공연을 뛰려면 방학을 거의 모두 반납하고 연습에 매진해야 했는데, 추운 날 인근 대학 캠퍼스 꼭대기 운동장에까지 가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다 연합 동아리에서 쇠(꽹과리)를 치던 첫사랑 선배와 짧은 연애 끝에 이별을 한 뒤 동아리에 더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동아리 활동과 멀어졌다. 그 덕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 서울대학 진학엔 성공했고, 대학 진학 후 그 첫사랑 선배와도 잠깐 다시 만났다. 물론 곧 헤어졌지만.

 

그렇게 장구를 손에서 놓은 지 십 수년 만에,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남편 따라 온 미국 어느 대학에서, 아이 엄마가 된 내가 무려 띠동갑 청년들과 팀을 꾸려 공연을 올리게 되다니. 4월 초에 있을 한인 문화 행사에 공연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네 명의 남학생들과 매주 토요일에 만나 4, 5주간 연습했다. 모두 과거에 한 가락 했던 인물들이라 기본 가락을 아는 상태였기 때문에 합을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덕분에 나는 매주 토요일,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 놓고 나가 신나게 장구를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사람들 앞에서 짧게 공연을 펼쳤다




<공연 영상의 일부.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디카 보급 초반부였기 때문에 공연 영상을 찍어서 본 일이 없었는데...!> 

(*익스플로러 브라우저 경우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를 설치해야 위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타악 연주를 처음 보는, 나와 친한 미국 친구들 모두 엄지를 치켜 세우며 내게 잘했다고, 멋졌다고 해줘서 참 좋았다. 그런데 정작 우리 애는 너무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울어대는 통에 엄마가 뭘 하는지 보지도 못했다. 남편 역시 아이를 달래느라 내내 나가 있느라고 하나도 못 봤단다. 안타깝지만 뭐..또 기회가 있겠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까 했던 모임이었는데, 저기 저 상쇠 자리에 앉은 열아홉 청년이 너무도 패기 있게 나서는 바람에 정식 학내 동아리가 될 조짐이 보인다. 나는 학생이 아니니까 거기 정식으로 한 자리 끼어들긴 어렵지만, ‘육아 스트레스풀러 한번씩 가서 같이 놀기로 했다. 이번 주는 쉬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 공연 후 평가도 하고, 앞으로 팀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 얘기해 보고, 다음 연습 가락을 뭘로 잡을지도 논의하기로 했다. 웬 아줌마가 끼어들어 와서 당황스러웠을 법 한데도 내색 않고 함께 한 판 잘 놀아준 덕분에, 이 아줌마 취미 활동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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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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