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가 아팠던 최근 보름 사이에 병원을 세 군데 다녀왔다. 희소질환이다 보니 만나야 할 의사가 많다. 그렇게 부지런히 좇아다녀도 답을 얻지 못하기 일쑤다. 배에 원인 모를 혹이 솟고, 잠을 못 잘 정도로 발바닥이 아프고, 여기 저기 붓고 멍이 드는 게 결코 '정상'이 아님에도, 케이티는 케이티라서 '이만하면 정상'이란 진단이 내려진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지만 한편으론 '그래, 이만해서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케이티가 주로 다니는 병원은 세 군데다. 예방주사 맞고 정기검진 하는 동네 소아과, 혈관전문의가 있는 대학병원 피부과, 그리고 그 외 각종 진료과들이 줄줄이 있는 아동병원. 그 중에서 소아과와 아동병원 얘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요즘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동네 안에서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진찰 받는 게 비교적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시장의 '단골' 개념처럼, 그냥 한 소아과를 오래 다니면 그 소아과가 '우리가 잘 가는 병원'이었던 것 같고. 그런데 여기는 조금 다르다. PCP(Primary Care Physician)라는게 있어서 아이들마다 '주치의'라고 할 수 있는 1차 진료 의사를 두게 되어 있다. (물론 보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얘기고, 보험에 따라 지정 PCP가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비교적 경미하거나 일반적인(내과적) 증상에 대해서는 이 PCP에게서 진료를 받고, 다른 과에서 검사가 필요하면 이 PCP가 그 동네에 있는 다른 과 다른 의사에게 진료의뢰를 넣어준다. 특별히 의사나 병원의 '서비스'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면 꽤 오랫동안 이 한 사람의 PCP에게 진료를 보는 분위기다. 


또 한국의 동네 병원이나 소아과에는 예약 환자보다는 당일 환자가 더 많은 게 일반적인데, 이곳은 동네 병원도 철저히 예약제로 이뤄진다. 그래서 비교적 경미한 증상이 있을 때나, 정기검진/예방접종 때문에 내원이 필요한 경우 병원에 전화를 하면 먼저 간호사와 의료 상담을 하고 짧게는 2~3주, 길게는 두 세달 후로 예약을 잡아준다. 사안이 심각한 경우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 애를 안고 소아과에 갈 수는 없다. 무조건 우선은 간호사와 상담을 해야 한다. 애가 어떻게, 얼마나 아팠고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죽 읊어주면, 간호사가 이러저러한 다른 방법을 얘기해주는 식이다. 간호사 판단에 '이건 당장 의사를 봐야 한다' 싶으면 그 날 오후나 다음 날 오전 중으로 최대한 빨리 진료를 볼 수 있게 예약을 잡아준다. 


여기까진 내가 제법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다. 특히 소아과의 경우는 애가 조금 아프다고 무작정 병원에 가서 기다렸다 의사 보고 별 처방도 못 받고 돌아오는 것보단 간호사와 상담 하면서 단 몇 시간이라도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기 같은 건 원래 약을 먹어도, 안 먹어도 회복기가 비슷하다고들 하고, 아기들에게 흔하다는 수족구나 장염 같은 것도 아주 심한 케이스가 아니면 특별한 약물 치료를 해 주기 어렵다고 하니까. 게다가 내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오랫동안 보아 온 '담당의사'가 있다는 건 친밀감 면에서나 의료 효과 면에서나 좋은 일이다.


그런데 케이티의 경우처럼 희소질환을 갖고 있어서 여기 저기 진료의뢰를 넣어야 하는 일이 다반사일 때는 그 '담당의사'의 존재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신생아, 유아기의 아이가 희소질환을 갖고 있을 경우, 어떤 증상이나 특이점이 나타났을 때 그게 모든 신생아/유아들이 겪는 일반적인 것들인지 아니면 이 특정 질환 때문에 나타나는 것인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런데 PCP를 거쳐 진료의뢰를 넣고 예약을 잡다보면 답답한 상태로 몇 주씩 지나기 일쑤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건 정말 심각한 건데!' 싶은 순간에는 결국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응급실에 가도 정말 급한 외상 환자나 심장 마비 환자 같은 경우가 아니면 두어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응급실 보다 한 단계 낮은 '응급 치료센터'라는 데가 있긴 하지만 희소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은 응급 치료센터에 가봐야 다시 응급실로 전원조치 된다고 한다. 해당 질환에 대해 아는 의사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위안이 되는 건 '아동병원'의 존재다. 미국에는 각 주마다 아동병원이 최소 1군데, 최대 10군데 이상 들어서 있다. 검색해 보니 한국에도 아동 전문 병원이(대학 병원 부설을 포함해) 열 곳 이상있는 것 같지만 미숙아집중치료 시설이나 장애아 재활 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곳은 그보다 더 적은 것 같다. 최근에 '푸르메 어린이 재활병원' 착공식이 있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장애아동을 전문적으로 보는 병원이 단 한 곳밖에 없다고 한다. 케이티가 다니는 이 곳 '라일리 아동병원'에는 미숙아치료실부터 장애 아동의 재활치료시설, 의료보조기구 맞춤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아픈 아이들을 많이 접해 온 이 병원 의사들 덕분에 케이티는 태어난 지 단 몇 시간 만에 진단명을 찾을 수 있었고, 각 전문의들의 협진과 상호 연락 시스템 덕분에 적어도 이 병원 내에서는 신속/정확하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케이티와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한국 내 아이들의 경우를 들어보면 한국 의학계 특유의 학벌/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환아와 부모들이 곤란을 겪는 때가 있다고 한다. 희소질환 일수록, '돈이 안 되는' 일일수록 외면받는 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의사들 사이, 의료기관 사이의 경쟁 구도 때문에 환자들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이곳 의사들은 다른 주에 있는 아동병원에 직접 문의전화를 넣기도 하고, 서로간의 임상 실험 정보를 나누며 진료의뢰서를 써주기도 한다. 물론 보험 문제를 비롯,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도 문제가 많지만 건강 문제에 특히 취약한 계층 앞에서 밥그릇 다툼, 잘난척, 권위주의로 얼룩진 모습을 보이는 한국 의료계도 개선되어야 한다. 


장애, 희소질환 등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전문 의료기관이 더 확산되어야 그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치료받고 보호받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의료계가 앞장서 준다면 장애와 희소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훨씬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의료계에서조차 이들을 받아주지 않고 외면해버리면 어느 누가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케이티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갔을 때 아이의 커다란 다리와 발을 보고 찌푸리거나 피하거나 면전에서 험담을 하는 일을 겪게 될 것이, 병원에서조차 박대 당할 것이, 나는 못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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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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