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도록 부엌 육아를 해 오면서
꼭 해 보고 싶은데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중의 하나가 '텃밭'이었다.
건강하고 좋은 식재료를 아이들이 즐겨 먹으려면, 그 재료의 근원을
직접 보고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부엌에서 아무리 열심히 조리해서 만들어도
아이가 그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나 부정적인 맛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음식과 친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채소가 그렇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색과 맛, 영양소를 가진 채소들이 있는데
제대로 한번 먹어보지도 않고 색이나 모양만 보고
아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때마다 부모는 속이 상한다.
우리집은 둘째가 특히 그랬다.
먹는 것에 대한 취향이 확실한 만큼, 고집도 세서
자기가 좋아하고 익숙한 것만 먹으려고 하고, 채소를 그렇게도 싫어했다.
한번 먹어라도 보고 그러면 좋겠는데,
입에도 대지 않고 고개를 휙 돌리길 몇 년째..
보통, 아이들의 식재료에 대한 호불호는
부모들에게 책임과 탓을 돌리기 쉬운데,
물론 가정에서의 식교육의 영향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느낀 것은
성격이나 체질과 마찬가지로,
아이마다 제각각 고유한 입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아이의 건강상태나 체질에 맞는 음식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채소를 싫어하는 둘째 아이와 음식 사이에
뭔가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혼 후 오랫동안 막연하게 주말농장 한번 해 보면 좋겠다 싶었던 우리 부부는
이 기회에 본격적인 텃밭농사를 생협 친구들과 함께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렇게 잡았다.
1. 텃밭에서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며
2. 일단,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아이가 기분이 좋도록,
음식을 먹기 전의 과정과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형성하고.
3. 흙, 식물, 곤충, 친구들과 한참 노느라 배가 적절하게 고픈 타이밍에 이르러.
4. 흙에서 직접 켜낸 채소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조리해 먹는다.
오이, 토마토, 가지, 피망 등이 풍성했던 여름.
고구마, 땅콩 등을 밭에서 바로 불을 지피고 구워먹었던 가을.
무, 배추, 시금치, 브로콜리 같은 채소가 놀랍도록 달고 맛났던 겨울.
추운 겨울날에도 텃밭에서는 그날 수확한 채소들로
따뜻한 전을 구워먹었던 게 벌써 추억이 되었다.
집에선 조금 먹고 금방 젓가락을 놓던 아이가,
오전 내내 밭에서 뛰어다니며 놀더니, 커다란 부추전을 세 장이나 먹었다.
텃밭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만에
좋아하던 채소는 더 잘 먹게 되고
그럭저럭 마지못해 먹던 채소는 이제 거부감없이 좋아하게 되었고
쳐다도 안 보던 채소에 대한 선입견도 많이 없어져 먹는 가짓수가 늘었다.
여전히 적극적으로 먹지 않는 채소들은 남아있지만,
예전보다 거부감이 심하지 않다는 게 크게 달라진 점이랄까.
입에도 대지 않던 이전에 비해, 몇 번은 젓가락이 가고 스스로 시도를 하게 되었다.
아마 올해는 먹는 가짓수가 더 늘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아이의 채소 거부증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이고 여유가 생겼다.
직접 가꾼 채소들이 항상 맛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건 차라리 사 먹는 게 낫겠구나.. 싶은 것들도 있다.
너무 작거나 너무 속이 차지 않았거나,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거나 ..
하지만 우리가 키운 대부분의 채소들은
흙에서 뽑아 물로 대충 씻어 그 자리에서 맛보면
정말 황홀할 만큼 달고 맛이 좋았다.
아이들도 어른들 권유에 멋모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우와..' 하며 서로 더 먹으려고 경쟁이 벌어질 만큼.
이번 겨울, 당근은 우리 텃밭의 가장 성공작이었는데
크기는 작고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정말 달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았다.
채소를 즐겨먹는 큰아이도 집에서는 당근을 날로 씹어먹는 일은 없었는데
밭에서는 더 먹고 싶어, 몇 뿌리 더 뽑아오곤 했다.
봄, 여름, 가을이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을 때긴 하지만
겨울에도 생각보다 참 즐거웠다.
무나 배추로 국을 끓이고, 전을 구워먹고 했던 겨울 텃밭이 벌써 그리워진다.
텃밭 한 켠에는 이전 주인이 심어놓았던 레몬 나무가 많이 자라 있었다.
수입 과일로만 알았던 레몬을 직접 키워 먹을 수 있다니.
몇 개 얻어온 레몬으로 레몬청을 만들고, 뜨거운 레몬차를 만들어 먹으며 보냈던
겨울 방학도 벌써 추억이 되었다.
작년 한 해동안 내가 한 부엌 육아 중에 가장 잘했다 싶은 게 바로 텃밭농사다.
잘 안 먹는 아이 땜에 고민이 많다면, 특히 채소 때문에 걱정이라면
아이가 10살이 되기 이전에 텃밭 체험을 해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제 곧 밭에서 할 일들이 늘어나는 봄이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땀을 흘리며 함께 나눠 먹는 일은
아이들에게 가공되지 않은 건강한 채소와 친해지는 효과는 물론,
가공되지 않은 산 교육과 학습의 기회까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가족텃밭활동백과>라는 책에 생생한 경험과 조언이 담겨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