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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이
한집 살림을 차린 듯한
3월 초 주말 오전.
가족 모두 9시가 되어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데
우리집의 젊은피, 8살 아들은 언제나처럼 7시 기상이다.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타다다다 뛰어 화장실로 직행,
촤 -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촤 - (이건 손씻는 소리),
그러고는 다시 타다다다 뛰어(아들은 집안에서도 걷지 않는다;;)
보일러 스위치를 눌러 틀어놓고는
거실 소파에 안착해 무릎 담요까지 야무지게 덮고는
주말에만 하는 애니메이션을 혼자 시청한다.

애니메이션 끝남과 동시에
스스로 개발한 무술(?)도
한 30분간,  하! 쓕! 이얍! .. 등의 효과음를 내며 놀고,
유아기 시절부터 좋아하는 장난감 괴물들을 데리고 또 한참을 논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어김없이 부엌으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일주일간의 피로로 머리는 산발에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냉장고를 뒤지던 엄마에게 아들은 자기가 요리를 하겠다고 한다.

'이런.. 망했다..'

10년 넘게 부엌 육아를 해도
아이들의 가장 무서운 한 마디는
"엄마, 내가 도와줄까요?" 다.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
속으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뭐 또 어떻게든 되겠지.

"너 볶음밥은 많이 해 봤으니까 그거 만들어 볼래?
 오늘은 재료가 부추랑 계란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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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8살 시기는
경이로운 일이 많이 벌어지는 신비로운 나이다.
뭐든 서툴고 아기같던 유아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손놀림과 사고력이 스스로 가능해 지는 시기.

왼손은 다치지 않게 고양이 손!
오른손은 위험하니까 힘을 너무 주지 않기!
유아기 땐 그렇게 가르쳐도 불안불안하더니
이젠 혼자
"이렇게 하는 거지? 이건 위험하니까 이렇게 해야 돼."
스스로에게 가르치듯 말하며 제법 잘 한다.

내가 8살 아들에게 순순히 부엌을 내 주는 데는
아이의 이런 성장 덕분인 것도 있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부엌일에 경험과 요령이 쌓이면
아이도 덜 어지럽히면서 순서대로 요리하는데 여유가 생긴다.
뭐든 익숙해지기까지가 불안하고 어려운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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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라이팬도 어느 부분을 잡으면 뜨거운지, 어느 부분을 잡아야 안전한지
확실하게 알게 된 모양이다.
손잡이 부분에 '주의'라고 쓰여있고 가운데에 느낌표가 있는데
그걸 가르키며 아들은,

"이 느낌표 있는 부분은 뜨거우니까 조심하라는 뜻이죠?"

아,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들어서 아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스스로 경험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구나.
아이들에게 요리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천천히 하나씩 배우고 경험하다보면
오히려 그 위험을 스스로 잘 다룰 수 있는 법을
몸으로 익히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늦잠자는 누나랑 아빠 몫까지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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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바나나 우유 만들기.
이것도 정말 간단하다.
바나나를 잘게 썰어(칼질에 아직 서툰 아이들은 채소보다
바나나, 두부, 소시지 등 부드러운 식재료로
연습하면 덜 위험하고 재밌게 할 수 있다)
우유랑 믹서기에 넣고 갈아주면 끝.

평소에 바나나를 잘 안 먹는 아인데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니,
신기한지 그 자리에서 한 컵을 원샷 ^^
몇 년 동안이나 멀리했던 음식을 하루 아침에 즐기게 되는
마법같은 일이 부엌 육아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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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동그란 밥그릇에 볶음밥을 꾹꾹 눌러담은 뒤,
그릇에 뒤집어 담으면 작은 언덕처럼 이쁘게 담긴다.
이렇게 간단하게 완성된 주말 브런치!

바나나 음료까지 곁들여 이쁘게 차려두고
아들은 누나랑 아빠를 깨우러 갔다.

부엌을 뛰쳐나가며 8살 아들이 하는 말,

"일요일은 참 좋은 날이야."

아이가 부엌에 방해하러 오는 것 같아
못마땅했던 애초의 마음이
눈녹듯 사라지는 순간이다.^^




** 8살 아들의 부엌육아 선배, 14살 딸이 가끔 차리는 주말 브런치입니다.
   프렌치 토스트는 초등학생이 만들기에 참 좋은 메뉴같아요.
   달걀과 계란물 듬뿍 식빵에 묻혀 굽고 설탕을 솔솔 뿌려 어울리는 음료와
   함께 먹으면 주말 아침의 피로가 싹 풀리죠.
   아날로그 육아기, 이번달은 <살림 다이어트>에 이어 <부엌육아 시리즈>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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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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