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올해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꼬박 13년이 걸렸다.
우리 부부에게 이렇게 외롭고 긴 육아의 시간을 지탱해준 건 뭐였을까.
막내까지 유아기를 끝내고 난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우리 두 사람이 가진 취미의 힘이 컸던 것 같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막 시작되었을 즈음,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더니 LP판 몇 개가 바닥에 나와있었다.
늘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남편이 집을 나서기 전에 잠깐 듣고 갔던 모양이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남편은 음악을 좋아했었지.'
두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도 남편은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아이들을 위한 동요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틀곤 했다.
장르도 클래식, 마이클 잭슨, 클럽 댄스음악.. 가리지 않았는데
특히 아주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LP판으로 듣는 걸 좋아했다.
이런 아빠의 영향인지, 아이들도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올려 듣는 음악을
좋아하고 가끔 아빠가 80년대 유행하던 댄스곡들을 선곡할 때면
셋이서 춤판을 벌이기도 한다.
평균 35년은 충분히 지난 듯한 납작하고 동그란 레코드판 수십장은
결혼할 때 남편이 시댁에서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그 중에는 어릴적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피터와 늑대> 뮤지컬 음악과
정경화의 바이얼린 협주곡도 있다.
30년이 지나도 표지가 깨끗하고 음질도 나쁘지 않을 걸 보면
남편이 정말 이 물건들을 소중히 관리해오고 그만큼 음악을 좋아했구나 싶다.
바쁠 때는 새벽 5시쯤에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이
식구들이 아직 자는 동안 헤드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간 흔적을 보노라면
가끔 안쓰러울 때가 있다.
긴장과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일을 하는 남편이
10분,15분 밖에 안되는 시간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에
잠시라도 머물러야 전쟁터같은 직장에서 하루를 견딜 수 있었을 테니까.
자투리 시간이라도 잠깐씩 아날로그 음악을 들으며
긴 직장생활과 육아기간을 그런대로 잘 즐겨왔으니
남편에게 음악은 분명 좋은 취미였음이 분명하다.
그의 취미 덕분에 두 아이도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듯 하다.
둘째가 제법 커서 이제 집안의 기계들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일이 줄어들었으니
좋은 음질의 스피커를 구해보자는 이야기가 요즘 오가고 있다.
마음에 드는 음악과 소리를 즐기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며
네 식구가 함께 오디오 매장에 구경나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결혼 후 15년을 외벌이로 살며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남편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다 재운 뒤, 남편이 음악을 들을 때면
나는 거실 소파에 다리를 쭉 뻗은 채, 인테리어 잡지를 보는 것이 취미였다.
예민한 성격의 두 아이를 상대하느라 밤마다 시체가 되곤 했던 나에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소파에 늘어져 있는 동안
폭풍육아 시기의 우리집 풍경과는 전혀 다른 쾌적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 사진들을
넘겨보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다.
도서관에서 몇 권씩 빌려와 보고나면, 다시 몇 권을 빌려오고 하며
동네 도서관 몇 곳에 소장되어있는 인테리어 책이란 책은 죄다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
서당개도 3년이면 뭐한다더니, 이게 몇 년 지나고 나니 내가 사는 공간도
나 나름대로 꾸며보고 싶다는 욕구가 나날이 커져갔다.
그래서, 그때부터 잡지를 볼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납이나 공간활용의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것들을 사진과 함께 메모해 두었다.
그런 자료들이 제법 모이고 나니,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 장식보다는 깔끔하고 빈 공간.
-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 자연스러움
이 내가 선택한 사진들의 공통점이었다.
우리집 인테리어의 전체 주제를 그런 것에 맞춰 하나씩 변화시켜 보았다.
2년 반 전에 지금 살고있는 주택으로 온 뒤로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다.
야단법썩을 떠는 아이들 틈에서 인테리어는 너무나 먼 현실같지만,
진짜 인테리어는 집 전체를 개조하고 새 가구를 세트로 들여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 눈길이 머무는 어떤 곳, 내가 자주 앉는 자리만이라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물건들을 놓아두는 것,
작은 화분 하나를 바라보며 일상의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인테리어라는 걸 말이다.
얼마 전 꽃집에서 사왔던 새둥지처럼 만든 소품 안에
아이들이 예전에 가지고 놀던 달걀 모양 장난감을 넣어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 두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은 물건을 볼 때마다,
험난했지만 소박한 행복이 가득했던 지난 시절들이 떠오르곤 한다.
알처럼 작고 연약했던 두 아이가 조금씩 둥지를 벗어나고 있는 지금의 일상도
다시 새롭게 느끼게 해 준다.
인테리어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사는 공간에 내 이야기를 입히는 것.
내가 머무는 공간을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
인테리어 책을 10년 가까이 읽어도 여전히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내가 사는 곳을 내 방식대로 가꾸는 법에 대해서는 이제 좀 감이 잡히는 것 같다.
남편의 취미가 두 아이에게 음악을 즐기는 법을 알게 한 것처럼,
그저 내가 좋아서 몰두했던 인테리어가 아이들에겐 알게모르게
일상의 미술교육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미술이 아니라,
우리가 머무는 공간 자체가 하얀 도화지가 될 수 있다는 걸
두 아이의 커가는 감성을 보며 새삼 깨닫고 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은 여유를 좀처럼 내기 힘든 게 현실이지만,
작은 시간동안이라도 부담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부부의 취미.
그 취미의 세계 속으로 아이들을 초대해 함께 즐기다 보면
의외의 육아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제 겨우 좀 알 것 같은
나의 인테리어 취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 혹, 인테리어에 관심있는 분이 계신다면
<조각보같은 우리집>이란 책을 소개합니다.
그림책 작가이신 두 부부가 함께 고치고 만들며 살아가는 이야기인데요,
삶과 미술과 인테리어가 하나가 되어 만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