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있는 몇몇 가정이 모여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하루를 보내는 육아모임,
그러니까 부엌공동육아 모임이라고 하면 맞을까? 싶은 일을
나는 꽤 오랫동안 꾸려오고 있다.
얼마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추사랑네가 하차하며
여러 사람들을 위해 온 가족이 출동해 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오사카 카레, 엄마는 주먹밥, 아빠는 냉파스타, 고모네는 우동,
이렇게 식구 각자가 분담한 음식을 한 공간에서 만드는 장면은
우리 <부엌육아모임>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먹방과 쿡방이 온 대한민국을 휩쓸면서
많은 사람들이 요리에 대한 정보를 얻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유독 어린이들만은 그런 분위기에서 소외된 듯 보이는 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해 주는 음식을 먹는 대상일 뿐,
요리의 주체는 될 수 없는 걸까.
팍팍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우리들 삶에
아이와 어른이 함께 어울려 느긋하게 먹고 싶은 걸 만들어 먹고
편하게 수다떨고 놀며 주말 오후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은 사람,
혹시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부엌공동육아 모임을 이렇게 만들어 보세요.
1. 일단,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아이들 연령이 다양하게 구성되면 아이들끼리 서로 돌보며 놀 수 있어 좋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큰아이가 두 세살쯤 때 세 가정이 마음이 맞아 자주
모여 놀며 늘 점심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아이들에게도 간단한 요리를 하게 했다.
밀가루 범벅이 되어 놀기도 하고, 피자 반죽을 하게 하기도 하고, 팝콘도 튀겨먹고..
요리 실력이 좋은 사람보다 맛있는 걸 아이들과 함께 먹고 싶은 의욕이 강한 사람이
모임에 더 열심히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2. 주방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땐, 집이 젤 편하고 좋은 공간이다.
모임 인원이 그렇게 많지 않다면 처음엔 구성원의 집마다 돌아가며 모여도 된다.
요즘 집값도 비싸다고 아우성들인데, 좀 힘들어도 아이들 어릴 때는 이런 식으로
집을 활용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근사한 주방과 완벽한 요리기구들이 갖춰져야 요리가 잘 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젤 맛있는 음식은 비좁고 가난한 옥탑방 부엌같은데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혼자산다>의 육중완이 살던 부엌을 떠올려 보시길^^
하지만, 모임이 꾸준히 지속된다면 좀 더 적당한 공간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공기관이나 생협에 가입해 있다면 부엌시설을 빌려 쓴다든가..
하다보면 좀 더 정보와 요령이 생길 것이다.
3. 모임 운영비와 요리재료구입비는 어떻게?
모임이 있는 날 사용한 전체 비용을 한 가정당 얼마씩으로 계산해 나누곤 했다.
그날의 요리 재료에 따라 싸지기도 하고 조금 비싸지기도 하는데,
한 가정당 비용이 평균 만원 - 2,3만원을 넘기지 않는, 부담없는 선에서 준비했다.
지금 내가 생협에 소속해 하고 있는 모임같은 경우는, 생협에서 지원금으로
연간 얼마씩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받아 사용하고 있다.
4. 모임의 총무, 리더, 장보기는 누가 어떻게?
스스로 만든 모임이니 결국, 모든 멤버가 스스로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돈관리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총무를 맡고(그래봐야 별로 큰 돈 관리가 아니라 쉽다;)
요리에 능숙한 사람은 레시피와 당일 전체 진행을 맡고,
식재료 구입은 모임 전에 분담해서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직 아이가 어린 신참 엄마들은 특별한 역할을 맡진 않지만, 뒷설거지나 쓰레기 정리를
스스로 알아서 도맡아 하곤 한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조용히 하는
멤버들이 많을수록 모임이 잘 굴러간다. 왜냐하면, 부엌육아는 손으로 해야 할 자잘한
일들이 많은 모임이기에.
5. 아이들이 하는 요리, 보육은 어떻게?
기본은 아이들에게 억지로 요리를 가르치거나 시키지는 않는다.
언제든 아이들이 원할 때, 그 아이의 연령에 맞게 채소씻기나 다듬기, 썰기, 볶기 등을
어른이 함께 돕거나 지켜보는데 자기 아이, 남의 아이 구분없이 돌본다.
어른들이 집중해서 작업을 해야 하는 때는, 요리조와 보육조를 나눈다.
가끔은 큰 아이들이 맡아주기도 하고 함께 온 아빠나 할머니, 혹은 생협 모임의
선배 엄마들이 참여해 아이들과 놀아 주시는데, 음식이 완성되면 이분들께도
점심을 대접해 함께 먹는 식이다.
대충, 이런 식인데, 베이비트리에 자주 소개했지만
일단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부엌공동육아 모임 구경을 해 보자.
가장 최근에 있었던 모임은
<무농약 밀감으로 만드는 요리>가 주제였다.
내가 사는 일본은 동네마다 공민관이라 부르는 시민센터같은 곳이 있는데
낡고 오래 된 곳이라도 꼭 조리실이 딸려 있다.
우리 모임은 대부분 이곳에서 모임을 하는데 사용 후 공간을 이용자가 직접
정리정돈하는 대신, 비용이 들지 않는데 모임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배경에는
이런 공공 공간의 덕이 큰 것 같다.
각 계절별로 해마다 만드는 요리들이 정해져 몇 년째 이맘때면 해 오고 있는데
이날은 1년치 먹을 마멀레이드를 만드는 날이라,
엄마들이 모여 앉아 밀감 껍질을 벗기고 있다.
아이들은 50대 베테랑 선배 엄마들이 오셔서 옆 방에서 놀아주시고,
오랫만에 폭풍수다를 떨며 손작업을^^
이럴 때가 부엌공동육아하며 젤 행복한 때다.
새학기에 긴장하거나 적응하느라 힘든 아이들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근황이나 육아 정보도 공유하고, 맛집이나 건강, 쇼핑 관련 고급정보도
엄청 쏟아진다. 유치원, 학교, 동네 엄마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얘기들을
한달에 한번 이 모임에 오면 어쩐지 속시원히 풀고 위로도 받곤 한다.
백일도 안된 아기를 데리고 오거나
나처럼 중학생 큰아이도 이끌고 참여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덕분이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마멀레이드도 거의 완성이 되어 간다.
황금레시피니 누구누구의 대박 레시피니 하지만
결국 음식은 자기 입맛에 맞아야 하는 법.
당도도 과육의 질감도 우리 입맛에 딱 맞출 수 있으니
막 졸인 따뜻한 마멀레이드를 빵이나 크랙커 위에 얹어 먹으면
달콤한 과일을 그대로 먹는 듯 하다.
호들갑스럽게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 입씩 먹이면
다들 함박웃음^^
사치와 호사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점심은 간장, 요리술, 마멀레이드로 졸인 돼지고기.
된장국에 따뜻한 밥에 달콤짭잘한 고기 한 점씩 얹어 잘 먹었다.
엄마들이 요리하는 한편에 여자 아이들이 마련한 프리마켓 코너.
집에서 불필요한 어린이 물건들을 가지고 와 아이들 스스로가 가게를 열었다.
가격도 천원에서 3천원 정도로 아주 저렴한데
손님들도 남아들은 어디들 가셨는지..
여자 어린이 손님들만 북적북적^^
디저트는 제일 큰언니가 책임을 지고 아이들이 함께 만들었다.
달걀 흰자를 전동거품기로 거품내는데 어린 아이들은
얼굴을 빠뜨릴만큼 집중해서 바라본다.
마멀레이드를 넣은 반죽으로 구워 생크림을 입히면
롤케이크가 뚝딱 완성!
마지막에 딸기 장식하는 저 통통한 손.. 어쩜 좋아^^
소박한 모임이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커피광인 엄마가 집에서 가져온 신선한 원두와 분쇄기.
수동이라도 역시 기계 곁에는 남아들이 자리싸움을^^
네 살의 팔힘으로 시원하게 갈아주었다는.
아직 식지않은 따뜻한 마멀레이드 병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금방 내린 커피와 먹는 롤케이크.
아이들이 반죽해 생크림을 장식하고 인원수만큼 몇 등분해 접시에 담아
엄마들 앞에 놓아 주었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우고 마지막 놀이판을 또 벌인다.
이때가 보통 오후 3시쯤.
차와 케잌을 먹으며 다음 일정과 메뉴에 대한 의논을 하는 걸로
모임은 마무리된다.
요즘은 요리가 아이들에게도 여러모로 좋다고 해서
요리교실이나 수업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다.
물론 우리 부엌육아모임 아이들도 오랫동안 이런 활동을 하면서
얻는 것이 적지 않다.
새로운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보는 기회, 직접 실컷 요리해 보는 기회,
신기한 조리 과정들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기회,
부엌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
조리의 기본과 식재료에 대한 지식 ...
그런데 10년 넘게 해 보고 나니, 사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일뿐
더 중요한 것을 많이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야식당>같은 육아모임이랄까.
아이를 키우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찾아가
부담없이 아이들을 맡기고 따뜻한 음식들을 먹고 위로받으며
당분간 다시 살 힘을 얻어오는 그런 곳 같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행복같은.. 그런 뭔가를 느끼는 모임이다.
아마 내가 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앞으로 필요한 것은 이런 충만감이나 행복감이 아닐까.
외롭고 고된 육아의 시간들을
함께 요리해서 나누어 먹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채우는 가정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