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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립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책가방 속에는
<재해, 그때 우리는>이란 제목의 가이드북이 항상 들어있다.
지진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학교나 가정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신속하게 대피할 것인지,
연락이 두절되었을 경우 가족이 각자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메뉴얼이 자세하게 쓰여있는
작은 책자인데, 아직 어려운 한자를 잘 모르는 저학년 대상의 가이드북(사진 왼쪽)에
히라가나로만 쓰인 <재해>라는 글자에 엄마는 어쩐지 마음이 짠해 진다.

올해 6학년인 큰아이가 저학년일 때 일어났던
동북 대지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진이 두려워 교실 안에 겉옷이나 가방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못한 채,
실내화 바람으로 운동장에 모여앉아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몇 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아이들 모습이 어제일처럼 눈에 선하다.
올봄에 1학년이 된 작은아이가 받아온 재해 가이드북을 보면서
이 두 아이가 지진이란 재해를
운명처럼 떠안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있던 차에, 네팔의 지진 소식을 들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예능프로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나는,
중국, 벨기에에 이어 네팔인인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요즘 이야기가 참 재밌었다.
배낭여행을 한창 하던 20대 때 네팔을 가보지 못한 걸 엄청 후회하면서
영상으로라도 실컷 즐겨보리라, 기대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네팔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산악지대에다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이라 들려오는 소식들이 너무나 절망적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 7곳 중 4곳이 파괴되고
계속된 여진으로 추가 붕괴위험 때문에 사람들은 집 밖에서
노숙과도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속에는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야하는 젖먹이나 어린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에 일어난 네팔의 참상을 지켜보며, 우리 가족이 사는 일본도
언제어디서든 다시 그런 상황을 겪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재해를 겪는 어른들의 고통도 말할 것 없지만
그 곁에서 일상의 많은 부분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 견뎌야 하는 아이들은
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4년 전에 일어난 대지진 때도, 바깥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상황 탓에
오랫동안 집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아이들이 무척 힘들어 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일상을 겨우겨우 이어가면서도
아이들이 재해로 인한 스트레스를 심하게 겪지 않도록 고심해야 했다.

4년 전의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은
아직도 가설 주택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불편하고 불안한 일상이 장기화되면서 아이들의 스트레스도 점점 심각해져
연필을 심하게 물어뜯거나, 생기를 잃고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방사능의 위험으로 오랫동안 바깥에서 뛰어놀지 못한 후쿠시마의 한 어린이는
"숨이 멎을 만큼 마음껏 달려보고 싶다."  고 말했다...

네팔은 이제 어떻게 될까.
후쿠시마와 네팔의 지진과 세월호의 아픔을 겪은 아이들과 가족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을까.
세월호 1주기를 추모하는 글을 모은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재난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에게는 재난 유토피아의 경험이 없지만 이 형용 모순적인 표현 안에는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길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끔찍한 재난이 닥쳐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모든 인간이 오로지 생존과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며,
재난 앞에서 고통과 기억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한다."

- 창비어린이 2015.봄호 <재난과 아동문학> 중에서 -

재난은 되도록 안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지만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또 일어날 것이다.
위의 글에서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안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찾고
재난 앞에선 사람들과 고통과 기억을 나눠가지는 것이 아닐까.
대지진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가 그랬던 것처럼
재난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똑똑히 지켜본 지금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이웃 나라의 비극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며,
그 속의 아이들의 삶을 함께 돌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육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Be with Nep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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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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