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필요성.

말해 뭣하랴.

우리 아이 성향에 맞는 운동을 찾아주는 일은

부모라면 누구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일 거다.

더구나 그 아이가 아들이라면 더더욱.

초등 입학 이후로 아들은 나날이 자라나

자기 자신도 감당하기 벅찰만큼 힘이 넘치는 모양이다.


우리 아들만 그런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올해 초등 2학년이 된 아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드는 때까지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좁은 집안에서도 여기갔다 저기갔다..

혼자 칼싸움인지 무술인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흉내를 내다가

소파 위에 뛰어올라갔다 내려왔다..

오늘은 뭘 또 부수거나 망가뜨릴라나, 걱정이 들다가도

'그래, 게임하는 것보단 낫지..' 하는 생각을 내가 하기가 무섭게,

"엄마!! 게임해도 돼요??"

하...


그래서 내린 엄마의 결단.

아들아!! 운동하자!!

아직 저학년인데 무슨 운동이면 어떠랴.

그런데 엄마 욕심이 또 그게 다가 아닌 걸..

되도록이면 꾸준하게 오랫동안 했으면 좋겠고,

매달 드는 회비도 저렴했으면 좋겠고,

선생님도 기술만큼 인성이 좋으셨으면..;;


아이들이 규칙적인 반복과 훈련을 즐길 수 있을만큼

선생님의 능력과 매력이 뛰어나야할텐데 그런 선생님 찾기가 어디 쉬운가.

게다가 '돈을 많이 안 들이고' 라는 조건까지 욕심을 냈으니

그렇게 운동을 가르쳐줄 곳은 없겠지하며

기대치를 낮추고 가까운 운동교습소를 찾아다닐 때,

이게 웬 떡인가 싶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실내체육관에서

저녁 시간을 이용해 농구나 배구, 가라테 같은 운동을 배울 수 있다는 거다.

학교 공간을 허가받아 빌려쓰는 만큼,

비용도 아주 저렴해서 부담이 없다는 사실.

각 운동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같은 지역에서 그 운동으로 오랫동안 커뮤니티를 꾸려온 분들로

자신의 본업 외에도 퇴근 후나 주말 시간을 이용해

거의 자원봉사에 가깝게 참여하시는 분들이란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태권도와 비슷한 '가라테' 담당 선생님은

걸작 그림책 <100만번 산 고양이>의 작가 사노요코가 다녔던 미대에서

강사로 근무하시는 분이라는데..

그림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는 난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가라테 교실이 있는 날, 아이와 함께 바로 달려가

견학을 하고, 빛의 속도로 등록을 마쳤다.^^


크기변환_DSCN6757.JPG


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 답게

선생님이 나눠주신 가라테 교본에는 직접 그리신

이 운동의 기본 동작과 규칙들이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글자보다 그림에 더 빨리 반응하는 저학년 아이들도 이해하기 쉬웠는데,

선생님 자신의 직업 혹은 개성이 드러나는 지도방식이
일반적인 운동교습소와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자신의 본업은 따로 있다보니, 뭐랄까.

이 운동에 대해 선생님이 가진 순수한 열정같은 게 느껴졌다.

학생수도 그리 많지 않아 아이 개개인과 충분하게 소통을 하며

천천히 지도할 수 있는 분위기도 독특했고.


크기변환_DSCN6731.JPG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랜 수련으로 먼저 검은띠를 딴 선배 형아들이
어린 동생들을 가르치고 돌봐준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진은 함께 운동하는 고등학생 형이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아들의 도복 입는 걸 도와주거나 연습할 때 조언을 해 주는 모습이다.

사설 학원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 성격이 강하다보니
동네 형, 동생끼리 같은 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아들에겐 이 형들이 정말 의미있고 큰 존재인데
운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00형이 이랬어 저랬어, 복근이 장난이 아냐, 하며 자랑을 많이 한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멋진 형아가 되고싶어 한다.
2학년이 되고부터는 1학생 동생들이 몇몇 새로 들어왔는데
그 친구들 앞에서 아들이 굉장히 잘하려고 애쓰더라는,
그 덕분에 실력도 꽤 늘었다며, 선생님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오셨다.

비용 부담이 거의 없다싶을만큼 적고,
아이에게 익숙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운동을 배우는 점 등
긍정적인 부분들이 많은 만큼, 어려운 부분들도 당연히 있다.
거의 자원봉사 형태로 운영되다보니, 역시 부모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러 지역이 모여 큰 대회를 열 때면,
부모들이 경기운영을 도와야 한다거나
담당 사범들이 자신의 일을 마치고 난 뒤에야 훈련이 시작되니
운동을 다 마치고 집에오면 8시가 훨씬 넘어,
저학년들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시간대가 된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 운동 수업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다닌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운동을 하러 온다거나
부모들끼리 함께 참여하는 일이 많다보니
크리스마스 파티나 신년회를 자체적으로 열어 즐기거나 하며 친하게 지낸다.
아이에겐 학교, 반 친구들 외에도
운동을 통해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관계의 망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나의 운동을 통해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의 한 부분을 형성할 수 있는 점도 좋고,
단순히 돈을 받고 가르치는 관계를 넘어
선생님의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배울 수 있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부모도 크게 욕심내지 않고, 장기적으로 아이가 즐겨가며 배우길 바라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스포츠 선수들에게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기술이나 실력 외에도 인문학적인 소양과 인간성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스포츠 교육은 지나치게 결과에만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로를 꿈꾸거나 세계적인 대회까지 나가고자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기술과 실력, 결과까지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린시절에 시작하는 운동은
결과에만 얽매이기보다
선택한 운동의 장점을 충분히 즐기며 경험하고
규칙적인 연습을 통해 참을성을 기르고
같은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사회성을 기르는 기회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앞서 이야기한 미술교육과 마찬가지로

예체능을 잘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순수한 열정인 것 같다.

어린시절,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자신에게 맞는 운동 하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예체능 사교육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 커뮤니티나 소소한 스포츠 동호회를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기회를 아이들이 가질 수 있다면.

남자아이들 뿐 아니라, 여자아이들에겐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일본 여성들은 지역사회의 이런 커뮤니티를 통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 참 많다.

 

동네 엄마들이 모여 하는 배구단은 각 지역마다 거의 다 있을 정도인데

40,50대가 되어도 저녁식사를 마친 8시쯤이 되면, 학교 실내체육관에

배구하러 엄마들이 하나둘 모이는 걸 자주 보았다.

어떤 엄마는 10대부터 농구를 취미로 쭉 해 오고 있는데,

실내체육관에만 들어서면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좋다는 말을 한다.


체격은 작은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한국 엄마들보다 일본 엄마들이 체력이 훨씬 좋아보이는 이유에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취미나 일상으로 해 온 여성들이 많아서 그런걸까.

공부든 일이든 살림이든 육아든

모든게 기본적으로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아이 평생의 삶의 자산이 될 체력을 키우기 위해

아들은 물론, 딸들에게도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해 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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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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