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해가 밝은지 얼마되지 않아
나에겐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평생 연락할 일이 없을 것 같던 사람, 단체에게서
불쑥 연락이 온다거나, 그 연락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일들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기도 하고
꼭 이루어질거라 믿고 연말내내 기다려왔던 일(재취업을 위한 시험과 면접이었다)
의 결과가,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 것으로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끝나기도 했다.
쓴맛, 단맛이 교대로 찾아오는 다채로운 1월의 나날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둘째 아이가 많이 아팠던 일이었다.
이번 겨울, 일본 열도는 독감이 어마어마하게 유행을 했는데
둘째가 그만 걸리고 만 것이다.
다른 해에 비해 증상도 유난히 심각했던 이번 독감은
늘 건강하고 활발했던 둘째 아이의 몸을 무서울 정도로 점령해버렸다.
독감이 아무리 심하다해도 1주일 그럭저럭 앓다보면 낫기 마련인데,
그 1주일이 지나도 아이는 심한 기침으로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뭘 좀 먹으면 그래도 기운이라도 차리면서 앓을텐데
식욕까지 완전히 잃은 아이는 물과 약 이외엔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심한 날은 약까지 다 토해내어 한밤중에 응급실까지 갔다.
종합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더 해 본 결과,
폐렴이라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치료하고 식욕이 돌아올 수 있도록
애쓰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꼬박 2주 넘게 아픈 동안, 2.5킬로나 살이 빠져 갈비뼈가 선명해진 아이는
겨우 식욕을 되찾고 조금씩 먹으며 웃음도 되찾았다.
그렇게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시 가게 된 날 아침.
부산 친정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었다.
2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친정 아버지는
그동안 입원과 퇴원, 재입원을 반복하셨다.
외국살이를 하는 탓에
아이들이 큰 이후로는 3,4년 지나야 겨우 한번 다니러 갈 수 있었던 친정을
지난 2년동안은 아버지가 위독하실 때마다 서둘러 비행기를 타야했다.
지난해 여름부터는 식사를 잘 못하시고
무서울 정도로 체중이 줄면서 기력이 약해져 가족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작은 가방 안에 옷 몇 가지와 여권 등을 넣어두고
언제든 친정에서 연락이 오면 그 가방을 들고 비행기 탈 준비를 해 두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갑작스럽게 할아버지 뵈러 갈 일이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모르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가족끼리 정한 메뉴얼대로
해야한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그런 나날들이 지나
결국.. 그런 때가 와 버렸다.
설마설마 아직은 아닐거야 하며 상상조차 피해왔던 일,
공항에서 장례식장으로 바로 찾아가야하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보내드렸던 순간들은
... ...
사실 아직도 글로 잘 옮길 수가 없다.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
깊이 들어갈 엄두가 안난다.
천천히 내 내면속에서 다독이고 이해하고 타이르며 정리해가고 싶다.
다만,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동안 찾아와 주셨던 많은 친척분들과
우리 형제들의 지인들이 보낸 위로와 감사의 시간은 추운 겨울날을
따뜻하고 환하게 밝혀 주었고,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들을 엄마와 우리 3형제가 함께 돌보며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게 참 많구나.."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오는 길에 운전을 하며 혼잣말을 하던 오빠의 말이
아직까지 귓가를 맴돈다.
나의 아버지는 40년 가까이
12톤 큰 트럭이나 버스를 운전하는 일을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험하고 고단하고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무시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늘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버지께서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하고 뿌듯해 하셨기 때문이다.
흙먼지에 뒤덮여 지저분하고 험하게 보이기 쉬운 트럭을
아버지께선 늘 정성들여 직접 세차를 하셨다.
반들반들하게 닦아 광을 내며 혼자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시며 차를 닦으셨다.
"와.. 너무 멋있제."
늘 정갈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큰 트럭을 보며 동료분들도 가끔 감탄하셨고
"나도 한번 타 보자" 하시며 우리 아버지의 차를 탐내셨다.
그때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남들이 다 하찮다고 여기고 무시하는 일도,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면 남들도 그렇게 봐주는 날이 온다는 걸 말이다.
내가 밥하기와 청소같은, 해도해도 표가 안 나고
특별히 인정받을 기회도 없는 집안일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이런 아빠의 뒷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탓이 큰 것 같다.
마흔이 훨씬 넘은 지금도, 길을 가다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작은 체구로 큰 트럭에 매달려 짐을 싣거나 차를 닦던 뒷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는 자연스레 이런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나도 우리 아빠처럼 저렇게 성실하게 살아야지'
주택으로 이사온 지, 올해로 벌써 5년째가 된다.
첫 해 이후로 꽃을 통 피우지 않아 뭐가 잘못 된 걸까.. 싶었던 수선화가
4년만에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작지만 진한 꽃향기를 풍기는 수선화를 한참 바라보면 또 아버지 생각이 난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유난히 운전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다음 생에는 아버지같은 분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태어나시길..
저도 아버지처럼 성실하게 남은 생의 시간을 살아갈게요.
저희 곁에서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비가 되어
언제나 함께 있어주세요.
아직도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병원을 가면
거기서 내 이름을 부르며 맞아주실 것 같은 아버지..
힘들고 고단했던 시간은 다 잊으시고
따뜻한 곳에서 마음 편히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