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망을 붓글씨로 쓰는 것에 이어,

중1 큰아이의 방학 숙제 중에는

<스스로 도시락 만들기> 라는 게 있었다.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담은 도시락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부엌에서 한참을 고심하며 우당탕하더니 겨우 다 만들었다며

두 개의 작은 도시락통을 내민다.

메뉴는 김밥과 생선살로 만든 동그랑땡.


여러 반찬을 한 가지 음식으로 섞어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큰아이답게

김밥도 시금치, 당근, 달걀을 다 따로 말았는데, 속이 이리저리 밀려

김밥 옆이 다 터진 게 너무 우스웠다.

"멸치는 또 뭐야??" 하고 물었더니,

칼슘/무기질을 넣어야 5대 영양소를 채우는데,

없어서 잔멸치를 볶지도 않고 그냥 옆에 뿌렸단다.

고기가 아닌 생선살로 동그랑땡 만든 건 좀 창의적이네?!

맛은 어떨란지 모르지만.

모자란 비주얼은 두 가지 색 방울토마토가 채워주었으니

이만하면 그런대로.. 과제제출용 사진을 찍고 난 뒤, 맛을 보니

모양에 비해서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아직 어설프기는 해도,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아이랑 부엌육아한답시고 함께 요리를 만들며

부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아이가 이만큼 크고 보니, 요리나 부엌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연관된 가정교육은 예상했던 대로

유아기부터 초등시절까지가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아이가 일단 학교생활만으로도 너무 바빠지고,

잘 하던 아이들도 시간에 쫒기게 되면서

집안일이나 자기 주변을 치우는 일에는 무관심해지게 된다.

그래도 0-13살까지 자라는 동안 충분히 연습한 생활습관과 교육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이번 도시락 만들기 숙제는

큰아이가 정말 오랜만에 부엌일을 한 셈인데도

요리의 기본은 여전히 손에 익어있었던 모양이다.

수영이나 자전거타기처럼,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도

한번 제대로 익혀두면 기본기는 평생 자기것이 된다.


10년이 넘게 아이와 부엌육아를 하고, 함께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요리의 과정은

쌀을 계량해서 씻어 밥솥에 세팅하거나,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고르고 꺼내 씻고 다듬어 준비해 두는 일,

다 준비된 반찬과 국, 밥을 그릇에 나눠 담고 수저를 놓는 일 같은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손 움직임이 필요한 단순노동이 무척 많지 않나.


유아 때부터도 이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할 수 있고,

아니, 오히려 큰 아이들보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성별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무척 부엌일을 즐긴다.

바쁜 어른의 생활리듬에 맞추려면 부엌을 향한 아이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겁이 날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집 나름의 룰을 정해서 주말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부엌일을 가르치면, 그런 일상이 초등을 졸업하는 13세 정도까지 이어지면

놀랍도록 많은 능력들을 기를 수 있다.


아이 생활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이라고 생각한다.

요리를 가르친다고 해서, 세탁을 가르친다고 해서

처음부터 수제 햄버거를 만들고,

이불 빨래하기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지 않나.


크기변환_DSCN7400.JPG

초등 2학년인 둘째는 주말이면 점심준비를 돕곤 한다.
부엌일을 한창 야무지게 돕던 누나에 비하면,
자기가 재밌어하는 일만 골라하려 하고,
마지막 단계까지 완성되기도 전에 귀찮아하며 줄행랑을 치거나,
부엌에 장난감까지 들고 와서 어지럽히곤 했다.

그래서, 더 쉬운 일, 더 간단한 작업을 맡겨서
아이 스스로도 성취감을 느끼고, 부모인 나도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도록 했다.
다 삶아진 스타게티 면을 식구들 수대로 나눠서 담는 일 정도는
가르칠 필요도 없을만큼 하찮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생활을 하고 나날의 일상을 보내다 보면
다 된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줄 누군가,
다 차려진 밥과 반찬을 차리기만 해 줄 누군가,
식탁위에 수북히 쌓인 서류들을 옮기기만 해 줄 누군가가, 늘 간절하다.

배우자에게 층층히 쌓이는 불만은 어쩜 이렇게 사소하고 하찮은 도움과 배려를
자발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난이도가 높은 집안일까진 못하더라도
하찮을 만큼 사소한, 쉽고 낮은 단계의 일들을 내 일로 여기고 연습하게 하는
생활교육은 스스로 공부하는 힘과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해 가는 일과도
크게 맞물려 있다.
지금 30,40대 부모들이 유난히 살림과 육아를 힘들어하는 배경에는
우리 스스로가 어린시절에 생활교육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못한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싫든좋든, 요리, 청소, 빨래는
인간이면 누구나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면
좀 더 익숙하게, 좀 더 즐겁게, 좀 더 합리적으로 해 낼 수 있는 연습의 기회를,
지금 아이들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아주 쉬운 것부터,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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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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