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이의 과소비.jpg

 

"엄마, 나 오늘 학교 끝나고 문방구 들려서 반지 하나 사도 되죠?"
" 반지? 얼만데?"
"한 5백원?"
"알았어. 니 용돈에서 사는거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아침에 헤어졌던 아홉살 막내를 방과후에 데리러 갔다.
배가 출출해서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 앉았는데 딸의 손가락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반지 샀구나? 그런데 한개가 아니고 두개네?"
"네.. 엄마... 이쁘죠?"
"그게 하나에 5백원짜리야? 엄청 화려하네?"
"이거는 하나에 천오백원짜리예요."
" 천오백원? 그런데 두 개나 샀어?"
"사실은... 너무 이뻐서 두 개 샀어요. 은주랑 베프 커플링으로요. 그래서 은주도 반지 사주구요.
성지도 갖고 싶다고 해서 사줬어요"
"아니 무슨 돈으로 그 비싼 반지를 다 사줬을까? 오늘 문방구에서 뭐 뭐 산거야?"
"음... 반지 내꺼 두개, 은주, 성지꺼 하나씩, 그리고 인스랑 슬라임도 사고, 젤리도 사 먹고..
친구들 아이스크림도 사 주고..."
"뭐? 그렇게 많이? 그래서 도대체 얼마를 쓴 건데?"
"다 합치면... 만사천 오백원이요.."
"뭐라고? 만사천오백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놀래서 말이 안 나왔다.
전날 집에 다녀가신 손님이 윤정이와 이룸이에게 용돈 만원씩을 주었다.

그 돈과 그동안 용돈 모은 저금통까지 홀딱 털어서 만4천 5백원을 들고 나와서 다 써 버린 것이다.
"세상에 이룸아. 엄마, 정말 놀랐어. 초등학교 2학년이 그렇게 큰 돈을 학교에 들고 와서 다 써버린
것도 놀랍지만 엄마에게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네 맘대로 다 쓴 것도 놀랍고.."
이룸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돈을 다 쓰는 동안 엄마 생각 안 났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 안 들었어?"
"엄마... 제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요. 집에 가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여긴 분식집이잖아요"
아이쿠, 이 똑똑한 녀석 같으니라고..
공공장소에서 야단맞는 것은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구나..
일단 분식집에서 얘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열 여섯인 큰 아이도, 열 두살인 둘째도 물건 욕심은 많았지만 이룸이 나이에 이런 일은 없었다.
돈을 쓸 때는 제 용돈이라도 꼭 허락을 받았고 문방구에서 이렇게 큰 돈을 한 번에 써 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아홉살인 막내가 문방구에서 무려 만4천5백원이란 돈을 제 맘대로 한번에 다
써버린것이다. 그 담대한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내가 잘못 키웠나? 아이들 앞에서 소비를 함부로 했던가? 아이들에게 쉽게 돈 쓰는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모바일이나 홈 쇼핑도 안 하는 사람인데 어린 아이가 돈 쓰는 것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다니
어디서 잘못된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집에 와서 윤정이까지 셋이 둘러 앉아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윤정이는 이룸이의 이야기를 듣더니 역시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돈을 한번에 다 썼어? 와, 대단하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저금통을 털었구나?"
"윤정이는 이룸이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잘못했죠. 일단 돈을 쓰기 전에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야죠. 그리고 이룸이가 산 물건은
완전 조잡하고 쓸모도 없고 그냥 갖고 싶다고 다 산 거잖아요. "
"그래. 문방구에 가면 사고 싶은 물건 많지. 다 갖고 싶지.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안되잖아.
물건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고 싶은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면 항상 돈을 써야 하니까.
엄마, 아빠같은 어른도 돈을 번다고 다 사고 싶은 걸 사지는 않아. 만약 그러면 우린 정말
가난해 질 걸? 이룸이 행동에 엄마가 정말 충격 받았어. 그래서 계속 생각해봤어.
엄마, 아빠가  이룸이 앞에서 돈을 함부로 쓰는 모습을 보여준걸까, 기분 내키는 대로 쓰는
모습을 보여준적이 있었나..."
"아니예요. 그냥 저 혼자 제 맘대로 쓴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그 돈 다 쓰는 동안 엄마 생각은 안 났어?"
"처음엔 다 쓰려고 한게 아닌데 하나 두개 사다보니까 돈이 안 남았더라구요"
"돈이란게 그래. 계획없이 쓰다보면 가지고 있는 걸 다 쓰게 돼. 그러니까 계획을 세워야지.."
이룸이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거렸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물건을 사주는 일도 좋지 않아. 선물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하는 거야"
"친구들이 사달라고 해도요?"
"그래도 안돼. 너희같이 어린 아이들이 친구한테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옳지 않고
너도 그런 부탁을 친구한테 하면 안되고.."
"내가 반지 사줘서 다음에는 은주가 나한테 뭐 사주기로 했는데요.."
"그것봐. 누군가에게 물건을 사 주면 그 사람도 너에게 사 줘야 하는 숙제가 생기는거야.
그러면 계속 사주고, 받고, 또 사줘야 되잖아. 그런 일은 옳지않아. 은주한테는 물건 안 사줘도
된다고 내일 학교에 가서 얘기 해"
제가 사 준 만큼 친구에게 받은 생각을 하고 있던 이룸이는 몹시 실망하며 후회하는 눈치였다.
는 이번 일은 좀 엄격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것 같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룸, 이번 일은 정말 심각한 일이야. 돈을 쓰는 일은 제대로 잘 배워야 해. 그래서 이룸이는
한 달간 용돈을 안 줄꺼야. 엄마가 주는 벌이야.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반성문 쓰고.."
"엄마, 반성문은 정말 똑 부러지게 쓸 자신 있어요"
이룸이는 별안간 눈빛이 생생해져서 이렇게 외쳤다.
잘못한 일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다가 반성문은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백배해진 것이다.
아이고... 이 녀석은 정말이지 내 예상을 늘 벗어나는구나....ㅜㅜ
이룸이는 반성문 멋지게 쓸 생각에 힘이 번쩍 나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

정말 멋들어지게 쓴 반성문을 들고 나타났다.

 

이룸이의 과소비2.jpg

 

 

- 반성문 -
나는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가서
은주와 성지에게 아이스크림, 인스, 반지, 슬라임, 젤리, 공포 카드, 과자를 사주었습니다.
내가 사장님에게 돈을 줄 땐 좀 이상한(?) 느낌 이었습니다. 아깝기도
또 후회되기도 신 나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돈이 아깝고
물건을 사서 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을 한 내가
실망스럽습니다. 엄마한테 거짓말 한 것도요.
그래서 정말 엄마, 아빠, 언니... 아니 우리 가족 모두에게
정말로 죄송하단 말을 여러번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큰 돈을 2학년이 가지고 있고 그걸 허락없이
다 썼다는 점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나 자신이 실망스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엄마의 따끔한 혼이 내 정신줄을 잡아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학교에 돈도 안 가지고 다니고
돈을 쓸때도 꼭 허락 받고 쓰고 내가
친구에게 사달라고 하거나, 친구가 나에게
사달라도 하는 것도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습니다. -

엄마의 따끔한 혼이 내 정신줄을 잡아주었다니... 속으로 웃음이 푹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이 녀석... 아주 열중해서 신나게 반성문 쓰는 일에 빠져있었구나.
제 말대로 정말 똑 부러지게 써 왔네.
이렇게 영리한 녀석이라서 가끔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고를 치기도 하니...ㅠㅠ

그리하여 깜찍한 아홉살 막내는 요즘 근신중이다.
일주일에 5백원씩 받던 용돈도 끊기고 자숙 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보기엔 별로 반성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엎드려서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데 다가가서 보니
'엄마한테 사 달라고 할 물건들' 목록이었다.
공부용 타이머에 파우치, 거울 달린 필통이며 무지 노트까지 목록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아아.. 이 아이는 정말....ㅜㅜ

이룸아, 이룸아, 말썽도 잘 부리고, 반성문도 잘 쓰고, 말은 더 똑부러지게 하는 막내야.
천천히 자라자,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네 영리함을 조금 더 멋진 일에 써 보자꾸나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31810042/1c8/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145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힘들땐 '딸랑이'를 흔들어 주세요!! imagefile [2] 신순화 2018-01-23 6258
144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들과 함께 자고 싶어하는 아빠 imagefile [2] 홍창욱 2018-01-24 6253
143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딸은 사춘기 엄마는 갱년기 imagefile [3] 윤영희 2018-06-21 6250
142 [소설가 정아은의 엄마의 독서] 너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결혼이라는 통과의례 imagefile [4] 정아은 2017-12-14 6239
141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67편] 미세먼지 많은 날엔 이런 음식이! imagefile [5] 지호엄마 2017-05-16 6221
140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엄마 달 imagefile [2] 최형주 2017-05-31 6203
139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이 온다 imagefile [2] 신순화 2018-03-28 6200
138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imagefile [3] 정은주 2018-04-19 6178
137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어른책] 매일 먹는 놀이밥 imagefile [8] 서이슬 2018-02-20 6159
»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막내의 과소비 imagefile [4] 신순화 2018-11-06 6149
135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세상 속으로 등 떠밀기 imagefile [1] 정은주 2017-05-01 6128
134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아이책] 그것이 사랑 imagefile 서이슬 2017-07-20 6127
133 [박진현의 평등 육아 일기] 장래희망? 내가 어떻게 알아! imagefile [3] 박진현 2018-03-06 6114
132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두 마음 사이 전쟁 imagefile 강남구 2017-12-01 6112
131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아이책] 누구에게나 있는 것 imagefile [4] 서이슬 2017-10-16 6109
130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가능하지 않은 걸 꿈꾸면 안되나요? imagefile [4] 윤영희 2017-07-25 6096
129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뿌린 대로 거두리라 imagefile [3] 정은주 2018-03-16 6088
128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우린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어 imagefile [5] 신순화 2019-01-08 6075
12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빨래, 그래도 별 탈 없다 imagefile [3] 신순화 2017-10-12 6071
126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수학꼴찌, 초등 2년 내 딸을 위하여 imagefile [6] 홍창욱 2018-03-25 6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