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근처엔 주말마다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극장들이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제주는 문화의 불모지’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시설 좋은 공연장도 많이 생기고 수준 높은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는 곳도 많다. 몇 년 전 처가 식구들이 서귀포에 놀러왔는데 마침 컬투공연이 있어 보러갔다. 무료공연이었는데도 빈 좌석이 드문드문 있었고 아이들과 함께 재밌게 즐겼던 기억이 있다. 서귀포예술의전당에는 아이들 공연도 제법 있는데 지난해에는 4살 둘째까지 데려가 아동극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아이들은 예술의전당을 지나가며 그때 본 ‘오도깨비’이야기를 한다. 좋은 프로그램이 많은 예술의전당은 최근에 홍보를 많이 해서 그런지 얼마 전 아이들 공연이 매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선착순이라 공연을 못 보게 된 것이다. 아니 컬투공연도 자리가 남는데 매진이라니. 7살 이상만 입장 가능한 공연이 대부분이라 5살인 둘째를 못 데려가서 아쉬운 적도 많았다. 요즘 아내와 아이들이 매주 가는 공연장이 있다. 옛 서귀포극장을 개보수하여 만든 관광극장이란 곳인데 재밌게도 천장이 없다. 태풍에 날아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랫동안 방치된 곳을 공연장으로 운영 중이다. 편안한 의자도 없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그냥 맞으며 공연을 봐야 하니 공연장으로서의 역할에 제약이 따르겠지만 특별한 장점도 많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여유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꼬마들을 포함한 가족단위 관람객과 이중섭거리를 오가는 여행객, 올레길을 걷는 도보여행객들, 지역주민들이 어울려 자유롭게 공연을 감상한다. 아이들이 떠들고 돌아다닌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없고 공연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아도 좋다. 빽빽하게 앉아도 100명이 앉을까 싶는 이 작은 공간에 매월 컨셉 있는 공연에 서귀포국제무용제, 해비치아트페스티벌, 국제관악제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볼 수 있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녹색 담쟁이를 볼 수 있는 곳. 이곳에서 많은 인연들을 만난다. 몇 달 전에는 대학 때 인연이 있었던 포크가수 김대중씨의 공연을 보았고 뽀뇨와 유현이가 좋아하는 사우스카니발 공연도 가끔 본다. 몇 주 전에는 무릉외갓집 동료였던 한은주씨의 모노드라마 ‘자청비’공연이 있었다. 어제는 해비치아트페스티벌에 다양한 국악공연이 있었는데 마지막 공연으로 제주의 전통 민요인 ‘이어도 사나’를 들었다.

내가 제주에 태어나지 않았고 민요를 부른 팀도 제주팀은 아니었지만 제주의 특별한 공간에서 이 노래를 들으니 제주가 마치 내 고향인 듯 아련한 그리움과 아픔이 밀려왔다. 뽀뇨와 유현이의 고향인 제주, 앞으로 많이 변하겠지만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사람들의 마음만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이 공간을 오가며 우연히 마주친 사람도 많다. 늘 우리가족에게 격려를 해주는 정은상 선배는 가끔 올레길을 걷는데 극장에서 우연히 세 번이나 만났다. 어제 공연에는 올레길을 걷던 대학 선배 영익이형과 형수를 만났다. 제주시에 사는 형인데 그냥 지나가다가 노래 소리가 들려 들어왔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 스치며 지나가도 좋고 잠시 쉬어가도 좋은 공간. 이 공간도 결국 개발이 되겠지만 오래 동안 우리에게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공연장.jpg » 선배형이 우리 가족인지 모르고 찍은 사진. 맨 앞줄에 앉아서 보고 있다.

관광극장.jpg » 극장에 오면 우연히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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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이메일 : pporco25@naver.com       트위터 : pponyo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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