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unsplash)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외로움’을 들겠다.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느낌. 강 건너로 화려하고 북적이는 세상이 보이는데 나만 홀로 외딴 섬에 고립돼 끝없이 고행을 반복하는 느낌.
이런 심정을 호소하면 사람들은 육아와 살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몰라서 그런다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런 말은 내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말들로 나를 다독이려고 수없이 노력해보았지만, 어느 정도 견디고 나면 결국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와 중얼거렸다. 가치야 있겠지. 하지만 모두 남을 위한 일인걸. 정작 나는? 나는 뭐가 되는 건데? 이쯤에서 자식이 어떻게 ‘남’이냐는 질문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자식은 ‘나’인가? 내가 두통으로 한 걸음도 땅에서 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치자. 자식이 그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는가? 내가 세상에 대한 고립감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하자. 자식이 그 마음을 체감하는가? 천만에. 세상 누구도 내 두통, 내 고립감, 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그러므로 자식은 남이다. 남편도,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비교적 가까운 남일 뿐, 남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남들에 의해 부정당하기 때문에 가족 관계가 상처와 불행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남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닌 사람. 그렇다면 남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거리를 두고 예의 바르게.
우리 가족 문화에서는 이게 안 된다. 특히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이 개념이 가장 많이 훼손된다. 아이와 부모가 뒤얽혀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아이와 부모는 분명히 다른 생명체이기 때문에, 이 얽힌 상태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러한 얽힘이 정점에 이르는 ‘독박 육아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엄마와 시어머니, 친척들에게 허우적허우적 손을 내밀었다. 결혼 뒤 위험하게 휘청거리다가 겨우 다시 정립되는가 싶던 나와 부모 사이 적당한 거리감이 아이의 탄생과 함께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런 내 처지에 공감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양가 조부모를 포함한 확대가족 중 누구도, 나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노골적으로, 온전히, 나에게 있었다. 나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저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남편도. 육아의 한 귀퉁이를 나누어 든 이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가 자신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느꼈고, 내가 기대만큼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으면 괘씸해했다. 나는 이 세밀한 마음의 흐름을 포착한 뒤 괴로워했고, 차츰 도움을 받는 비중을 줄여나갔다.
(사진출처 <까치가 몰고 간 할머니의 기억> 중에서)
그 외로움.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아이를 건사하고 있다는 감정만 아니라면 그 시기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으리라. 그 느낌을 감소시켜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와 연계되어 다가오는 새로운 분야의 세계들이었다. 취학 전 아이 하나를 키우던 이 시기에 나는 ‘어린이책’이라는 분야에 푹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삽화와 꾸밈없이 맑은 문장이 나오는 어린이책들은 펼쳐드는 것만으로 나를 치유해주었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이책에 대해 쓴 《어린이와 그림책》 같은 책은 나와 내 아이가 함께 책을 읽는 행위에 서리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엄마라는 자리에 날아드는 각종 부담들을 감당하느라 허덕이는 가운데, 엄마라는 자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빛, 깊은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단비 같은 책이었다. 때로 취학 전 아이를 둔 엄마들이 선배 엄마인 내게 육아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종종 호소할 때가 있다. 그 엄마들에게 나는 동화책을 읽으라고 권해준다. 아이에게 읽어주기 위해 억지로 읽는 거 말고, 본인이 끌리는 그림책을 골라서 읽으라고. 풀 길이 없는 감정에 깊이 빠져들 때는 해결책을 찾기보다 아름다운 것들과 대면하는 편이 낫다. 특히 그 감정이 지독한 외로움일 때는 사람보다 사물이, 소박한 그림이 담긴 작은 직사각형의 물건들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