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등학교의 과학 수업은 3학년부터 시작되는데
1,2학년들은 그 준비 과정으로 <생활>이라는 이름의 교과를 배운다.
말 그대로 '생활 속 자연과 과학 현상'을
4계절의 변화에 맞춰 배우는데
과학 공부와 삶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교육 방식이 무척 신선하다.
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 한 해를 보낸 아들이 공부한
<생활> 수업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1년간의 식물 키우기' 과정을 한번 들여다 보자.
봄에 갓 입학한 1학년들에게는 2학년 선배들로부터
나팔꽃 씨앗이 든 작은 봉투를 선물받는다.
봉투에는 2학년들이 그린 나팔꽃 그림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입학 축하해.
난 2학년 1반 00라고 해.
내가 날마다 물을 주고 키워 거둔 씨앗이야.
잘 키우면 여름에 연보라색 꽃이 핀단다.
너도 잘 키워보길 바래."
아이들마다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런 식의 메시지들이 적혀있다.
선배 형아들이 준 나팔꽃 씨앗은
자기 이름이 적힌 작은 화분에 심고 각자 키우는데
1학년들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시작하는 첫 일과가
이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이다.
밤새 싹이 났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살펴보며 옆에서 물을 주는 아이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은, 이제 막 학교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이
낯선 친구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줄기가 점점 뻗어가는 잎을 위해 사각형 모양의 지지대를
화분에 아이들이 직접 꽂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하면 좁은 공간에서도 많은 화분을 키울 수 있고
보관과 이동이 간편하다.
봄에서 여름에 걸쳐 나팔꽃은 극적인 변화를 보이며 성장한다.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라는 이름의 관찰일지에
1학년 아이들이 씨앗-싹-줄기와 잎-꽃이 피는 각 과정을
아이들이 저마다 기록해간다.
같은 식물을 보고 그려도 아이마다 관찰한 그림이 조금씩 다른 것이 재밌는데
자연 현상을 글과 그림으로 꾸준히 표현하는 것도
이 생활 수업의 특징 중 하나다.
꽃이 피기 전에 어떤 색과 모양의 꽃이 필지 상상해서 그리는 부분도 있는데,
교사는 아이들의 기록에 대한 평가를 점수 대신
꽃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한다.
여름방학이 되면
나팔꽃 화분을 집으로 가져가 계속 기른다.
긴 방학동안 관찰일지에 그림과 글쓰기 하는 것이 방학숙제다.
꽃씨 봉투를 준 2학년 누나의 편지글대로 연보라색 꽃이 처음 핀 날,
아이는 무척 기뻐하며 그림과 글을 썼다.
주택 거주자가 많은 일본 동네에는
여름방학동안 나팔꽃 잎이 무성한 이 화분이 집 앞에 나와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화분만으로 '아, 이 집엔 초등1학년 아이가 있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1학년 때 나팔꽃을 키우는 이 공부는 요즘 아이들 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이미 부모 세대 때부터 몇 십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5년 전에 1학년이었던 큰아이도 이런 공부를 똑같이 했는데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추사랑네 엄마, 야노 시호도 아마 초등학교 때
나팔꽃을 키워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2학기 개학과 함께 학교로 다시 가져간 나팔꽃 화분은
가을과 함께 꽃과 잎이 시들고 마르면서 수많은 씨앗을 남긴다.
씨앗은 내년에 입학할 신입생들을 위해 봉투에 넣어두고,
마른 가지를 모아 둥글게 말아둔다.
늦가을 무렵, 1학년 교실 복도를 가보면
아이들이 거둔 나팔꽃 가지들 풍경이 가을색을 물씬 풍긴다.
계절에 맞게 자연친화적인 인테리어 효과가 날 뿐 아니라,
왠지 모르게 교실 풍경이 따뜻하고 정감있게 느껴진다.
꽃과 잎이 다 지고, 볼품없는 마른 가지만 남았다고 방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렇게 걸어둔 가지들은 12월이 오면
이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바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기 위해
가지들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집에서 리스를 만들 재료들을 11월동안 틈틈히 모아 두었다가
그걸 가져가서 친구들과 생활 수업시간에 만든다.
남자 아이가 대충대충 만든 거라
준비해간 장식 배치를 균형감있게 하진 못했지만,
서툴고 소박한 모양의 리스가 1학년다워서 귀엽고 사랑스럽다.
걱정과 불안으로 시작한 초등학교의 첫 1년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가는 안도감이랄까..
아이가 만들어 가져온 이 리스를 볼 때마다 혼자 엄마 미소를 짓게 된다.
봄의 씨앗
여름의 무성했던 잎
가을에 다시 남겨진 씨앗
겨울에 남은 가지로 만든 리스
<생활>이라는 교과 제목처럼 우리의 삶은
국어와 수학, 사회, 미술, 과학 이 모두를
통합적으로 겪으며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대상을 관찰하고 학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기른 씨앗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편지를 쓰고,
직접 흙을 만지며 심어보고 물을 주고 돌보며
그들의 성장에 대해 쓰고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자연의 순리와 과학적인 사실들을 배우며
우리 주변을 아름답게 해주는 장식물로 활용하는 지혜까지,
과학은 학교에서만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있으며
또 얼마든지 나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요즘,
따뜻하고 귀여운 이 나팔꽃 리스를 볼 때마다
삶과 더불어 천천히 하나씩 배우는 과학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고,
꽤 즐겁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삶과 앎을 되도록 분리시키지 않는 것,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배움,
지금 우리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