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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조금 특이한 여행 스타일의 소유자다.

여행 준비를 할 때,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고 나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동시에

여행지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지인에게 꼭 연락을 하곤 한다.

한동안 뜸했던 그동안의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이번에 그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여행갈

계획이란 얘기를 자연스럽게 나누다가는 결국 이런 얘기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럼, 오는 길에 우리집에 들렀다 가지?"

 

이런 남편과 결혼해 살다보니, 우리 가족은 여행 중에 늘 '누군가의 집'에 묵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혼여행마저도 먼 외국이긴 했지만, 그곳 역시 남편이 아는 '누군가의 집'이었다.

결혼 전이었던 20대에, 아주 드물게 2주 정도의 휴가를 얻었을 때는 자기가 사는 도쿄에서 출발해

일본 북쪽에서 남쪽까지 전국 각지에 사는 친구집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여행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다.

 

3월말은 일본 아이들에겐 봄방학이라, 이번주에 후지산과 가까운 바닷가 소도시들을 가보기로 했다.
남편은 어김없이 목적지와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에게 오랫만에 연락을 한 눈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그 친구에게서 우리 가족 모두를 집에 초대하고 싶으니,
꼭 하룻밤 묵고 가라는 문자메세지를 받은 모양이다.
남편이야 정말 오랫만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니 좋겠지만, 나는 사실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남편 친구는 우리 가족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마음이 담긴 문자를
남편 핸드폰으로 틈틈히 보내왔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가족소개를 이런 식으로.. ^^

 

남편 : 만40세 7개월

아내 : 만36세 2개월

딸    : 만5세 9개월


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남편과 나는, 유머와 귀여움이 가득한 이런 문자를 함께 큭큭거리며

읽었고 우리도 가족 소개를 나름대로 재밌게 써서 보내곤 했다.


여행 안내 책자나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들로 상상할 수 밖에 없는 낯선 여행지가,
그곳 현지에 사는 사람과의 소통 덕에 떠나기 전부터 즐거움과 설레임이 더해지다보니
남의 집에 묵어야한다는 부담감과 어색함도 자연스럽게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아이들도 엄마아빠에게 이런 얘기들을 전해들으며 3월 내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꽃샘 추위도 조금씩 사그라들 즈음, 기다렸던 여행이 시작되었다.

산과 바다가 있는 후지산 주변의 관광지와 작은 도시들을 일정대로 여행하고

마지막 날, 남편의 친구집에 드디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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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떠나오기 전에

'불편하지 않을까..' '어색하지 않을까..' 망설이고 걱정했던 시간이 아까울 만큼,

이쁜 집에서, 집보다 더 이쁜 마음씨를 가진 가족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바닷가의 작은 도시답게 신선한 생선회와 남편이 좋아하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고기와 초밥, 스키야키 .. 
처음 본 사람에게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들에게 맛나는 음식은 긴장을 풀게 한다.

즐겁고 알찬 여행이었지만 3일간의 피로가 누적된 우리 부부도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진수성찬에 마음을 무장해제한 채, 부어라 마셔라 ..

남편은 자기보다 몇 살 어린 이 친구를 20대 때, 캐나다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알게됐다는데

일본에 돌아온 이후로도 몇 년에 한번씩 만나다가, 각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느라

지난 10여년 동안은 전화나 문자 연락만 가끔 할 뿐 통 만나질 못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뭐랄까, 여행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꽤 비슷해 보였는데

20대 때 처음 만나 10년만에 40대가 되어만나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변함없는 사이같았다.

처음은 둘로 시작된 친구관계가 이번에는 7명이 되어 만났으니

감회에 젖은 두 남자는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아빠들의 주변을 뛰어다니며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노는데 어느새 친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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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친구의 부인이 안내해준 우리가 묵을 다다미방.
번잡스런 둘째 녀석이 이 깔끔한 방을 많이 어지럽힐 거라 내가 걱정했더니,
"어지럽히는 게 손님의 특권이잖아요. 어린이 손님은 더더욱 그렇지요.^^"
아, 남편 친구가 결혼을 참 잘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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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와중에도 정성을 다해 우리를 맞이해준 친구의 가족.
일하는 엄마인 그의 부인은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 우리의 아침을 준비해주고 출근을 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친구는 3교대 근무로 야근을 해야 하는 날임에도 우리가 떠날 때까지
오전내내 우리 아이들과 놀아주고, 차나 먹을거리를 쉴새없이 대접해주며
현지의 맛집이나 스시박물관, 신선한 생선과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가게 등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겨우 하룻밤, 그 집에 머물렀을 뿐인데 우리가 여행한 '시미즈'라는 도시는
이 가족이 베풀어준 따뜻함으로 우리 식구에겐 빼도박도 못하게 특별한 곳으로 인식되어버렸다.
여행 전, 지도에서 위치도 찾기힘들어 헤매었던 '시미즈'라는 작은 도시 이름이
이젠 아이들까지도 금방 찾아 손가락을 짚으며,
아 그때 스시 진짜 맛있었는데 ..
바닷가에 갈매기가 시끄러웠지 ..
코코짱(그집 딸 이름^^)은 잘 있을까? ..

이러고 있다. 복잡한 지도 위로 그 전엔 보이지 않았던 많은 풍경이 그 지역이름과 겹쳐졌고
하룻밤이지만, 홈스테이했던 가정집의 분위기는 아이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번 여행 내내, 내 머릿속엔 자꾸만 떠오르는, 떠나기 전에 읽었던 책의 몇 구절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사회라고 한다.

돌부터 한글을 배우고, 유치원에서 이미 영어를 구사하며,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온갖 전집과 교구에 둘러싸여 자라는 아이들이 사회를 어려워하다니.
글자는 빨리 깨치지만 어려운 단어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지고,
집과 학원 사이의 좁은 세상에 갇혀 사는 아이들에게 사회 과목의 수많은 개념과 용어들은
외계어와 다름없을지도 모르겠다. 따로따로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합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다름 아닌 '공부'의 본질이니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고."
                                      - 책이 경험을 대신하는가? / 창비어린이 2014 봄호 2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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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지도의 수많은 지명과 각 지역의 역사, 경제, 정치, 자연환경, 방언, 특산품 ..
이런 것들을 모두 지식으로 달달 외워야만 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까.
여행은 책과 지도 속의 지명으로만 존재하던 곳을 자신의 오감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다.
거기에 현지에 사는 사람의 집에 홈스테이를 해보는 경험은 여행지를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물론, 맛있는 게 많고 유명한 관광지라 해도 다 좋은 사람만 사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예기치않게 좋은 사람의 친절이나 도움을 얻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곳은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고, 그 지역에 더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뉴스에서 그곳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귀가 솔깃해지고,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하면
웬지 전에는 하지도 않았던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 베이비트리에서 '화순'이란 지명을 자주 읽게 되는데, 잘 모르기도 했을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는 곳이건만, 요즘은 화순을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따라오는 누군가의 이름이 있는 건.. 나만 그런가^^

 

수많은 지명이 빼곡한 지도를 보고, 다른 나라와 다른 지역의 이름을 들었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근대는 마음을 아이들이 가질 수 있었음 좋겠다.
그곳에도 나처럼 아침에 잠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
그 아이가 먹는 아침밥은 나와는 어떻게 다른지, 요즘 젤 좋아하는 놀이는 뭔지,
어떤 언어를 쓰고 나의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좀 더 살아있는 사회공부가 되게 하진 않을까.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이지만, 지도 저 편에 착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는 믿음이 아이들에겐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지 않을까.
올해 5학년인 큰아이와 6살 작은아이에게
이번 여행은 분명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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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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