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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중학교에 입학한 큰아이.
초등학교보다 한 단계 더 넓은 세계에
이제 막 들어선 14살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작게 봉오리져 맺힌 꽃망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아기와 초등 시기동안 자라난 뿌리와 가지와 잎 속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담은 꽃이
어떤 빛과 모양인지 살며시 드러나는 그런 시기.

다행히도. 아이는 조금 두렵게 느껴졌던 중학교 생활을
의욕적이고도 즐겁게 시작하고 있다.
아이의 이런 즐거움 중에는 입학과 동시에 활동을 시작한
중학교 밴드부의 존재가 아주 크게 차지한다.

일본의 중학생들은 마치 한국 대학의 동아리 활동처럼
전 학생이 각자의 취미나 특기에 맞는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농구, 배구, 야구, 축구, 테니스 등의 운동 클럽과
미술, 과학, 합창, 브라스 밴드 등의 다양한 문화예술 클럽들이 있는데
큰아이는 이 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부'를 선택했다.
새롭게 사귀게 된 1학년 같은 반 친구들 외에도
이 밴드부에서 만나는 다른 반 동급생들과 2,3학년 선배들과의 만남이
아이에겐 꽤 신선하고 재밌는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 밴드부에 가입한 한 1학년 학생 학부모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을 아이가 가져왔다.
발달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이가 밴드부에 가입하게 된 배경과
그동안 지내온 아이의 삶과 그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감동적인 편지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가장 움직이게 하는 건,
유명한 육아 전문가나 교육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부모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다.

조금 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함께 읽으며
육아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 가족의 삶,
또 우리가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00의 엄마와 아빠입니다.
00는 '난독증'이라는 발달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문자를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있는 장애로, 글자가 흐리거나 비틀린 모양으로
인식되어 읽고 쓰기가 안 되는 것은 물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정교한 손놀림이나 행동을 민첩하게 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도 서툰 편입니다.

지금은 아빠가 지난 2년동안 아이에게 집중해
아침과 저녁 시간 내내, 놀이나 대화를 통해 글자를 가르친 결과
읽고 쓰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수준에는 따라가기 힘들어
초등 2학년부터 5학년까지, 또래 친구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학교를 거의 나가지 못했습니다.
5학년 말 무렵부터는 여러 선생님들의 이해와 도움과
친구들의 격려 덕분에 조금씩 용기를 내어 등교를 하기도 하고
또 쉬기도 하면서 초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던 형의 연주회를
가족과 함께 보러 간 아이가 음악에 큰 감흥을 받았는지
"나도 중학교에 가면 꼭 밴드부에 들고 싶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형은 지금 3학년으로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맡고 있습니다.
늘 소극적이고 위축되어있던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형은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고 돌볼거니까 들어와."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렇게 빛나는 무대에서 나도 연주해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모두에게 부담이나 폐를 끼치지 않을지 오랫동안 망설이다
중학교 밴드부의 담당 선생님들께 의논을 드린 결과,
선생님들께서도 함께 돕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용기를 내어 저희 가족은
이렇게 새로움 꿈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급생 여러분과 학부모 여러분에게 이렇게
부탁과 감사의 편지를 드립니다.

00는 발달장애 때문에 시간 감각이나 앞일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
어려운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자신이 맞추지 못하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실패로 인해 '커다란 불안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실패하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말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00가 발견한 자기 나름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00의 마음 속에는 늘 친구가 그립고 간절합니다)
아무쪼록 이런 00를 조금씩이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가족 모두 밴드부 여러분 모두가 멋진 연주회를 열기까지
최선을 다해 지켜보고 돕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인 00는 동생과 연년생인 아이로, 항상, 언제나
힘들어하는 동생을 지켜주고, 격려하며, 동생의 대변자로서
때로는 야단치면서 동생 앞에 나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가 저희 부부로서는 가장 걱정이지만,
항상 동생의 전부를 어깨에 짊어지고 학교생활을 해야하는
형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안쓰러워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의 삶과 성장을 지켜보며
저희 부부는 더 큰 용기를 내고 노력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00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으면
형인 00에게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부족한 점이 많아 여러분에게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멋진 밴드부의 가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따뜻한 가족 속에서 자란 친구와 함께
같은 클럽 활동을 하게 되어 정말 영광이다.
이제 막 악기 연습을 시작한 1학년 신입생들이
빛나는 무대에서
첫 연주를 하는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 편지를 써서 보내신 부모님이 자신의 두 아이가
함께 연주를 하는 첫 무대를 보게 되면
얼마나 행복하실까.
육아의 고달픔과 보람을 좀 더 다양한 부모들이
함께 나누고 소통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감동적인 편지였다.

평범한 아이들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자기만의 꿈을 간직하고 이룰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도록 부모들이
좀 더 나누고 연대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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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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