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CN2376.JPG



거의 매주, 송년회 약속이 하나쯤 잡혀있는 12월도 벌써 중순을 훌쩍 넘어섰다.

작년까진 어느 자리건 아이들과 혹은 남편까지 함께 참석했지만, 올해는 그러기가 웬지 부담스러웠다.

가만 있어도 바쁜 이 12월에 가족들 모두가 참석하는 건, 어떤 면에선 저녁 한 끼 다같이 해결하고

집에 돌아올 수 있으니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아이가 어릴수록 가능한 한 같이 데리고 움직이는게 차라리 편하기도 하고.


그런데 둘째가 이제 좀 커서 그런걸까.

요즘은 엄마없이 아빠, 누나랑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하는 둘째 덕분에

친구들과 잠깐 만날 일이 있을 때는 되도록 맡기고 혼자 다니고 싶다.

이제 어딜 데리고 가면, 두 아이는 자기들이 알아서 잘 노는 편이긴 하지만

먹는 것도 신경써서 챙겨줘야하고, 둘째는 아직 화장실을 따라가야하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하다보면, 사람들과 나누던 이야기가 늘 끊기게 된다.


아. 1년에 한 번 있는 송년회만큼은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훌훌 아무런 준비없이, 아이 물건이 가득 든 짐 보따리도 없이,

홀가분하게 다녀왔으면!

친구들도 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마침 연락이 왔다.


"아이들이 이제 아빠랑만 있어도 잘 노니까, 이번엔 우리 엄마들끼리만 한번 만나보는 거 어때??"


물론 너무 좋지! 안 그래도 남편은 사흘이 멀다하고 회사 사람들, 학교 동기들이랑 송년회다니느라

맨날 바쁜데, 나도 한번쯤은 애들 맡기고 살랑살랑 혼자 가고싶어!


올해 초까지 살던 아파트 친구들이, 아파트 내에 있는 파티룸을 예약해서

(이제 나는 이곳 입주민이 아니니 친구들이 불러주지 않으면 이용하기가 어렵다)

12월 어느 저녁, 드디어 엄마들만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DSCN0331.JPG

그리운 예전 아파트의 파티룸을 오랫만에 들어서니, 크리스마스 음악들이 잔잔하게 들리고
테이블에는 음식이 하나 가득~  저녁준비해야 할 시간에, 이렇게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자리, 그것도 신경써야 할 식구들 없이 오직 내가 먹고 마실 것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이
눈물나게 고맙다. 다른 엄마들도 모두가 한마음.
먹음직스런 음식들을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듯,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벌써 수다판이 벌어져
푸하하  캬캬캬  난리도 아니었다.

부페식으로 마련된 이날 파티는 각자 2만원 정도씩 낸 회비로 마련되었는데
스시나 술, 음료는 사 오고, 탕수육, 피자, 샐러드, 치즈케잌 등은 솜씨좋은 엄마들이 미리
재료를 구입해 집에서 만들어왔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정말 회비만 달랑 내고 빈 손으로 참석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영희씨, 작년까진 송년회 때마다 음식하느라 애썼잖아!
                           올해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즐겨."
그렇게 말해주는 다른 엄마들이 너무 고맙기만 하다. 이런저런 검사와 검진 때문에
병원을 다니느라 바쁜 내 사정을 아는 이 친구들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에,
'아, 내가 이 아파트에서 8년동안 산 게 아무것도 아니진 않았구나 ..'
싶어 뭉클하기도 했다.


DSCN2449.JPG

무엇보다 이날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오코노미야끼!!
오코노미야키 전문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엄마가 한 사람에 한 접시씩
손수 일일이 구워 즉석에서 소스를 뿌려 따끈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웬일로 앉아서 호강을 하는 나는, 양배추와 돼지고기가 듬뿍 든 오코노미야끼를
감격스러워하며 먹으면서도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닦으며 굽고 있는 그 엄마를 보고 있자니
또 짠해졌다. 음식 노동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평소에도 음식점에서 일을 하고 있어, 집안 살림에 식당일에,
모처럼 여자들끼리만 모인 이런 자리에서도 음식을 만드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도 그녀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여자들끼리 온갖 수다보따리 다 풀어놓으며 배꼽을 잡고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서른 둘에 벌써 아이 셋을 키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가 열심히 들어주며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러다, 다들 요즘 손에 물 넣으면 너무 아픈 이야기에 또 한번 공감 100프로 모드.
이날 유치원에서 떡치기 행사를 돕고 온 엄마는, 찬물에 손 적셔가며 떡 주무르고 하는데
엄마들이 모두   "아.. 손이 너무 아파.. "
하고 속삭이더란 말을 듣고는 또 한번 공감과 눈물바다 모드.
서로의 손을 막 보여주는데,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그나마 내 손은 나은 편, 몇몇 손톱 둘레가 모두 빨갛게 부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구.. 저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손 아픈 이야기만 나오면
늘 그렇듯이 어떤 고무장갑이 좋고, 무슨무슨 약을 바르고 자면 빨리 낫는단다, 식의
정보교환이 이어지는데, 그러다 결국 겨울이 끝나야 낫는다! 는 결론과 한숨으로 마무리..

너무 맛있고 너무 즐거웠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하루 저녁 몇 시간만이라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수다떨며
내가 먹고 마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게 얼마만인지.
둘째를 4년만 키우고 나면 훨 수월하다더니, 이제 나에게도 그런 때가 온 것일까.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 자신에게 속삭여 보았다.
'영희야, 그동안 수고했어.'
엄마들만의 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몇몇 엄마들도 너무 고맙다.
내년 이맘때에는 더 건강해져서 맛나고 푸짐한 한국요리로 그녀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실은, 요즘 올해 들어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이 좀 자주 피곤하기도 하고
이날 낮에 아들의 유치원 담임선생님과 개인면담에서 나눴던 이야기들 땜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에 대한 걱정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친한 또래 엄마들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한바탕 자유롭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피곤한 몸에 대한 느낌도 조금 사라졌지만
나에게 남은 숙제, 내가 아이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는 여전히 내 것으로 남아있다.
잘 해보자! 힘을 내야지! 늘 이렇게 마음은 먹는데,
그 무거운 의무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내 손에는
파티에서 남은 음식이 담긴 보따리들이 바리바리 들려있었다.
아이들 주려고 안 먹고 남긴 피자, 내가 만들면 그 맛이 안날 것같아 한 조각 남편에게 맛보여주고 싶은 오코노미야끼, 케잌, 안주들 ..
남편도 송년회 때 거나한 술과 음식 앞에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쯤 생각할까?
이 푸짐한 음식을 아이들 돌봐가며 대충 차린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 배우자는
어떤 마음일까, 떠올려 보는 걸까?

엄마들이여! 시간내기 어렵겠지만 우리들만의 파티, 좀 더 즐겨봅시다.
                이야기의 밀도와 집중도가 훨씬 높아져서 전보다
                아이들에게 몇 배는 더 생기있는 엄마로 돌아갈 수 있어요.
남편들이여! 아내가 가끔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먼저 배려해 주세요.
                그래서 술자리에 가 있는 배우자를 기다리며, 혼자 아이들 돌보는 마음이
                어떤 건지 직접 겪어보세요.

새해엔 부부간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더 진화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140276/41a/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203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육아 공감 선물 imagefile [7] 윤영희 2014-02-16 20491
202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무늬만 북유럽 육아, 아닌가요? imagefile [5] 윤영희 2014-09-24 20472
201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아이를 울린 엄마, 부엌에서 죄책감을 씻다. imagefile [3] 윤영희 2013-03-06 20319
200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 급식 문화, 같거나 다르거나 imagefile [13] 윤영희 2015-01-22 20169
»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남편,아이 없이 즐기는 엄마들만의 파티 imagefile [4] 윤영희 2013-12-19 19991
198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집이 키즈카페로 변신한 날 imagefile 윤영희 2013-05-12 19859
197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어딜가나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부모는 괴로워! imagefile [2] 윤영희 2013-11-25 19816
196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잘 안 먹는 아이, 입맛 잡는 5가지 imagefile [6] 윤영희 2014-11-10 19810
195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겨울방학, 우리집 먹방 TOP5 imagefile [8] 윤영희 2014-01-19 19694
194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아이와 함께 하는 베이킹, 소통과 치유의 지름길 imagefile [6] 윤영희 2013-09-06 19680
193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엄마의 올 여름 힐링 Best5 imagefile [3] 윤영희 2013-08-24 19486
192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의 육아는 아직 아날로그 감성시대 imagefile [3] 윤영희 2012-10-31 19322
191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이불터널놀이와 <브리콜라주> imagefile [2] 윤영희 2012-12-12 19245
190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그림의 떡 아니 집, 구경이나 하지요^^ imagefile [5] 윤영희 2013-01-24 19233
189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미개한 정부, 복원성 있나 imagefile [2] 윤영희 2014-04-22 19133
188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집밥' 엄마용 심야 식당 어디 없소? imagefile [4] 윤영희 2015-08-05 19021
187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육아가 두려울 땐, 식물을 키워보자! imagefile [5] 윤영희 2014-04-04 18949
186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여름방학 중간 보고서 imagefile [1] 윤영희 2013-08-10 18946
185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한국인 며느리 일본 시어머니 음식 탐방기 imagefile [7] 윤영희 2014-06-24 18931
184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일본에서 주부로 살며 겪는 방사능 문제 imagefile [11] 윤영희 2013-10-06 18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