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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부엌에서"

 

그림책 제목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도 엄마도 잠옷바람에 부엌에서 난리가 난,

밤 11:30    실제상황이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몹시 피곤한 날, 초저녁에 잠들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운좋게도 다음날 아침까지 푹 자주면 그야말로  에헤라디야~ 지만,

10,11,12시..

이런 애매한 시간에 눈을 번쩍 뜨는 경우(엄마의 심장이 멎는 순간)가  꼭 한번씩 있다.

 

그런 날은 '그래! 딱 2시간만 놀다 자자!'하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부엌으로 향한다.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 ...

이런 재료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

이런 오밤중에 먹기 위해 만드는 건 아니다.

아이가 다시 잠들 때까지 장난감으로 어중간하게 시간을 떼우는 것보다,

나는 뭔가 생산적인 걸 하고  아이는 그 덕에 실컷 놀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것.

이럴 때, 나는 "베이킹"이란 육아 무기를 꺼내 든다.

 

주로 다음날 아침에 먹을 빵을 굽거나 피자용으로 쓸 밀가루 반죽과 쿠키 반죽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냉동시켜 두기 위한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는 그 곁에서 떨어져 나오는 콩고물같은 여분의 반죽으로

신나게 주물럭거리며 놀 수 있는데

아이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한밤중에, 온 집안이 깜깜한데 부엌에만 밝혀진 불빛 아래서

이런 금기의 시간에 실컷 놀이를 즐기는 아이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보인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반죽을 실컷 주무르며 신이 난 아이의 입에서는

명대사들이 줄줄 흘러나오곤 하는데

피자용으로 쓸 채소를 씻으라고 줬더니 물에 둥둥 뜬 피망을 보며

"엄마, 피망은 수영복이 초록색이야!"  그런다. ㅋㅋㅋ

 

채소로 물놀이도 했다가 반죽으로 갖가지 만들기 놀이도 하며 노는 아이곁에서

가끔 추임새만 넣으며, 나는 비상식량 만들기에 집중한다.

완성된 반죽을 밀어 피자 기지가  만들어지는대로 차곡차곡 냉동실 칸으로 옮기고,

간식으로 먹을 쿠키 반죽을 종류별로 잘 섞은 다음, 랩에 씌워 다시 냉동칸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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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한, 두 시간 잠깐 논 것 뿐인데 식구들의 몇일분 간식이 뚝딱 준비되었다>

 

 

이젠 슬슬 정리를 할 시간. 

냉동실에 듬직하게 자리를 잡은 우리 둘의 결과물을 아이와 함께 잠시 감상하며

내일 아침, 누나와 아빠에게 자랑할 멘트를 미리 준비하는 둘째^^

사용한 베이킹 도구들을 같이 씻고 정리한 뒤,

아이는 다시 행복한 얼굴로 이불 속에 누웠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깊은 밤 부엌에서  모험을 마치고 무사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 주인공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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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중에서도 밀가루를 이용한 베이킹은 남녀 아이들 대부분이 즐기고 좋아한다.

요리의 즐거움은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가 형태나 맛이 변화하는 걸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인데

베이킹은 특히 기승전결 과정이 워낙 변화가 뚜렷하고

말랑말랑한 부드러운 반죽은 만지는 촉감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아이들이 만지고 난

밀가루 반죽은 얼마나 주물럭거렸는지 때가 타서 회색-으로 변할 때가 많다.

오븐 안에서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오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놀랍고,

피자 빵 케잌 쿠키들이 익으면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들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 순간만큼은 온갖 시름을 잊게 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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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하는 베이킹의 가장 좋은 점은

만들어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

갓 구운 피자를 앗! 뜨거를 외치며 먹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첫아이가 아기였을 때, 육아책만 읽기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육아 기술?을

배워두는 게 좋겠다 싶어 시작한 게 제과제빵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에서도 뭔가 재밌게 놀면서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기를 의도했는데, 그런 내 기대 이상으로 첫째인 딸에게는 300%, 둘째인 아들에게는 200%

성공적으로 쓰여졌고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손자손녀들과는 그동안 쌓은 노하우만큼 더 즐겁게 할 수 있겠다 싶어

베이킹 도구도 몇 십년 쓸 요량으로 좋은 걸 골라 사곤 한다.

 

아이들에게 밀가루 음식은 최소한으로 줄여주고 싶지만,

그래도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로 만드는 빵과 케잌은 아이들 몸에

필요한 당분과 영양을 공급해 줄 수 있다.

피자 기지도 통밀을 섞어넣거나 신선한 달걀이나 설탕 하나를 고를 때도

정제된 백설탕이 아니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질 좋은 설탕을 쓰게 되면

맛과 풍미가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쿠키믹스, 00믹스같은 인스턴트화된 베이킹 재료는 안 권하고 싶다.

기초적인 부분 몇 가지만 기억하면, 왕초보라도 짧은 시간내에

수제 쿠키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다.

직접 만들어본다면, 시중에 파는 과자와 빵들이 얼마나 엄청난 설탕과 첨가물을

사용한 건지, 싸구려 재료로 만든 그것들이 가격은 또 왜 그리 비싼 건지

차츰 알게 되는데...  이 이야기들도 언제 한번 써보려 한다.

 

개학을 하자마자 가을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배고프다 외치는 아이들에게 둘째 아이와 한밤중에

만들어둔 초코칩 쿠키 반죽을 냉동실에서 꺼내 구웠다.

홈 베이킹의 또 한 가지 큰 장점은 너무너무 경제적이라는 것.

유기농00, 친환경00를 먹고 사기 위해 큰 돈을 쓰고

그 돈을 벌기위해 또 많은 시간을 쓰는 것보다, 이렇게 남과 세상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의 기술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

스펙쌓기도 중요하지만, 평생 이런 능력들을 아이들이 하나씩 익히며 자랐으면 좋겠다.

 

갓 구워진 쿠키를 앗!뜨거를 외치며 먹는

오물거리는 아이들의 입을 보며

지금 먹는 이 음식들이 너희들 몸 속의 단단한 뼈와 살이 되어라..

자유로운 꿈과 상상력과 지성이 되어라..

엄마는 그렇게 주문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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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뭔가 미안한 게 있는 날

남편과 싸운 다음날

동네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은 날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해야 하는 날..

그런 날마다, 나는 달콤한 것들을 굽고 또 굽는다.

가족과 이웃과 나 자신과 더 깊이 소통하며 일상의 크고작은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여름을 심하게 앓았던 주부가 있는 우리집 부엌 오븐은 요즘, 그래서 쉴 틈이 없다.

베이비트리 엄마들! 컵케잌 한판 구웠어요. 함께 먹고 9월도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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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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