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만 더운게 아니라구요^^

 

DSCN1952.JPG

 

아이들 점심을 차리려고 부엌에 들어서니

누가 그랬는지 싱크대에 이렇게 그릇마다 꺼내 뭘 덮어놓은게 보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DSCN1953.JPG

 

역시 둘째가 그랬나 보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들에게

"장난감 차를 왜 이랬어?"  하고 물으니

"차도 덥잖아요. 그대로 놔뚸요."  그런다.

물 속에 손을 넣어 장난감 차를 만져보니 정말 시..원하다!

아침 먹은지 언제라고 또 점심을 차리나..

한숨을 푹푹 쉬며 부엌에 들어선  엄마는 잠시 밥하는 것도 잊고

장난감이 담긴 물에 두 손을 담근 채, 땀과 짜증난 마음을 제대로 식혔다.

무더위조차도 놀이로 즐기는 아이들이 부럽기만 하구나.

 

 

2. 방학동안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내는 순간

 

DSCN1945.JPG

 

큰아이 방학숙제 중에

우유팩(재활용품)을 이용한 장난감/장식품 만들기가 있었다.

다 먹고난 종이 우유팩을 펴지 않고 속만 깨끗이 씻어

부엌 한쪽에 크기별로 모아두었더니

어느날, 500ml 크기 두 개가 사라지고 없었다.

뭘 만드려고 그러나?

자기 방에서 한동안 조용하더니,

빨강머리 앤이 살던 초록지붕 집이라며 만든 걸 들고 나왔다.

방학 내내 <앤> 에니메이션과 책에 푹 빠져 살더니만,

결국 숙제도 거기서 힌트를 얻었나 보다.

 

사진을 찍어, 만든 이유와 과정을 설명한 글과 함께 제출해야 해서

아이들과 마당 여기저기에 장난감 집을 두고 함께 사진찍는 게 재밌었다.

숙제를 다 완성한 다음엔 식탁 옆 창가에 두었는데

밤늦게 퇴근해서 이걸 본 아빠도 잠시 힐링의 순간을 맛보았다고 한다.

소박한 성과물이지만, 더워서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이 초록지붕 집에 눈길이 머물 때면 엄마미소가 저절로~ 

 

 

3. 좋은 사람과 좋은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들

 

DSCN1956.JPG

 

1년 전에 오랜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도심과 제법 떨어진

한적한 시골 주택으로 이사간 친구가 있다.

늘 얘기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다가 올 여름에 드디어 가보게 되었는데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친구답게 집 밖이나 안이나

깔끔&아기자기&심플함이 넘치도록 이쁘게 잘 살고 있었다.

 

35도가 넘는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주는 듯.

아이들은 그 집 아이의 물건들로 너무 잘 놀고

시원한 차와 맛있는 음식으로 저녁까지 대접받았는데

늘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차근차근 잘 찾아가는

친구의 여유있고 지혜로운 말들...

아! 그 순간만큼은

이런저런 육아 고민도, 구멍난 가계부도,

나날이 악화되어만 가는 한일관계에 대한 걱정도

잠시 다 내려놓고 맘껏 즐길 수 있었다.

 

 

4. 친구들 사이에서 행복해하는 아이 모습을 볼 때

 

DSCN1906.JPG

 

전에 살던 아파트 파티룸에서

둘째 유치원 친구 엄마들과 몇 번 뭉쳐 놀았다.

여름이면 일본 아이들이 한번쯤 하고 노는 놀이.

눈을 가린 채 수박있는 곳을 더듬더듬 찾아가 방망이로 수박을 내리치는데

한번에 갈라지지 않으니, 아이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눈을 가리고 하는 놀이가 은근히 두근거리는 모양인지

어린 아이들은 좀 무서워하기도^^

 

자기가 눈 가린 채 수박에게 다가갈 때는 잔뜩 긴장하면서

다른 친구가 어리버리하게 헤매는 걸 보면, 왼쪽!! 오른쪽!! 아니 더 앞에!!

하면서 웃고 코치하느라 다들 큰소리다.

어느 순간, 수박이 "쩍" 하고 갈라지면 우루루 몰려들어 제멋대로 조각난

수박을 그 자리에서 우적우적 먹는 게 재미있다.

많아야 둘,셋 정도되는 친구들과 놀다가 이렇게 많은 수의 친구들 속에서

실컷 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드는 생각.

'오늘 정말 오길 잘 했어!"

이런 기회가 방학 동안만이라도 좀 더 자주 있으면 좋으련만!

 

 

5.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할 때

 

DSCN1936.JPG

 

내가 하는 밥이 지겨워질 때가 가끔 있다.

여름날의 부엌은 더더욱 들어설 때,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어느 날,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께서

 "여름에는 물에 말은 밥이라도 남이 해 주는 밥 먹고싶지?"

하시면서 차려주시는 밥상..  

내가 좋아하는 재첩 된장국, 단호박조림, 구운 생선, 마파두부, 미역초무침 ..

매콤한 한국 음식들은 없지만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자식들 입에 들어가도록, 목에 수건을 두르고 땀을 닦으시면서

부엌에서 종종거리시는 어머님 모습은 한국 어머니들과 다름이 없다.

친정 엄마가 생각나기도 하고 일흔이 넘은 시어머님께 너무 죄송한 순간이기도 하고..

한 여자가 편안해지려면, 또 다른 한 여자가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구나 싶어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진정한 위안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더니

다 쓰고 보니, 모두 사람 덕분에 위로와 힐링을 얻으며

무더운 이 여름을 무사히 지내온 것 같다.

생각해보면, 더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에어컨과 보일러보다 사람에게 듣는 말 한 마디나 마음 씀씀이 때문에

유난히 시원하고 따뜻하게 보내온 게 아닐까.

앞으로 지구는 더 뜨거워질텐데

더우면 더울수록 사람들과 함께 해야 가장 시원해질 수 있다는 것

올 무더위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 신순화 님.

   소식 읽고 너무 놀랐는데, 댓글쓰기가 안 되서 늦었지만 몇 자 덧붙입니다.

   무더위에 힘드셨을텐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어머님께서 바람과 햇빛과 꽃이 되어 늘 가족분들 곁에 머물러 계실 거예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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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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