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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책가방.
'란도셀'이라 불리는 이 가방은 입학 전에 준비해서 초등을 졸업하기까지 6년 내내 사용한다.


일본 아이들의 초등학교 문화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란도셀'이라는 책가방이 아닐까?!
일본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아이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색깔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형태는 거의 비슷한 이 가방을  1학년 입학식 때부터 6학년 졸업하는 날까지
꼬박 6년 내내 이 한 가방을 매고 학교를 다닌다.

이 가방이 전국 초등학교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고 하는데,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소재나 색깔, 크기 등 시대와 유행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 진화해 왔다고 한다.
네덜란드와 일찍 교류를 시작한 영향으로
배낭이란 뜻의 네덜란드어 'ransel'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란도셀'은
보다 매기 쉽게, 등에 부담이 없게, 보다 안전하게, 무엇보다 가볍게, 가
이 가방을 고르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들인데
대부분의 란도셀은 사용하다 파손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6년간 무료 수리 보증서가 딸려있다.

위 사진의 빨간색 가방이 올해 6학년인 큰아이가 1학년 때부터 들고다닌 가방인데
여자 아이들은 물건을 깨끗하게 쓰는 편이라 그런지, 아직 수리를 맡겨본 적이 없다.
란도셀에 관해서라면 왠지 극성스러워지는 일본 부모들을 예전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쓰는 물건에다 가격도 만만하지 않으니 한번 고를 때
신중해 질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주변에 남자 아이들을 보면, 역시 거칠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보니 고학년 쯤 되면
어깨끈이 떨어지거나 가방 뚜껑이 너덜거리거나 해서 급하게 수리를 맡기느라
서랍 깊숙히 넣어둔 보증서를 꺼내 란도셀을 구입한 회사에 전화를 했다는 엄마들 얘기를 듣곤 한다.
파손된 가방을 맡기면 수리가 끝날 때까지는 다른 가방을 대여해주고.

5년 전에 큰아이의 란도셀을 산 이후,
올해 작은아이의 초등 입학이 있어 두 번째로 란도셀을 장만했다.
일본 부모들은 이 가방을 선택할 때, 아이들의 색깔 취향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데
어떤어떤 색이 좋다고 아이들이 얘기하고 나면, 가방의 소재나 디자인 등을
예정된 예산에 맞춰 선택하는 편이다.
우리집 두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빨강!" "나는 검정!" 하며
자기가 쓸 란도셀 색깔에 대해 노래를 불렀던 터라, 별 망설임없이 고를 수 있었다.

란도셀 준비를 둘러싸고, 큰아이 때 분위기와 조금 달라진 것은
점점 더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이 첨가된 상품이 많아지다보니 가격대가 높아진 점이다.
6년이나 쓰는 물건인데다 아이에겐 평생 한 번뿐인 선택이니, 이왕이면 좋은 것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고가의 란도셀을 구입하는 경향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일본의 조부모라는 존재의 영향도 무척 크다.
집집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손자손녀의 첫 입학 선물로 할머니할아버지께 이 란도셀을 선물받는 경우가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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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축하금을 넣어주는 전용봉투(?)에도 가방 그림이 있을만큼
란도셀을 사는데 보태라는 뜻으로 조부모로부터 축하금을 받거나,
직접 사서 보내주는 경우, 아이와 함께 사러가는 경우도 있다.
60대 이상의 일본 노인층은 노후가 불안한 지금 30,40대에 비해
아직은 연금혜택을 제대로 받고 있는 편이라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다.
더구나 겨우 하나, 둘 있는 손주들이다보니 뭐든 좋은 걸 사 주고 싶어하다보니
란도셀 시장도 점점 고급화, 고가화되어가는 게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있는 한편 여전히
저렴한 편인 란도셀이라 해도 6년동안 쓰는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며
화려한 디자인과 브랜드를 따지기보다, 기능적인 면에 충실한 란도셀을 망설임없이 고르는
부모와 조부모들도 주변에는 많다.
우리 가족도 지난 5년동안 써 온 큰아이의 책가방을 지켜보면서 '음, 이거면 충분하겠다' 싶어
작은아이의 란도셀을 망설임없이 고를 수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가방을 거칠게 다루고 함부로 던지기도 한다는데
아들아이가 무사히 이 가방 하나로 6년 초등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신중하게, 또 적지않은 돈을 들여 마련한 물건인만큼
아이들이 6년동안 쓰는 자기만의 이 가방을 소중히 여기고 다룰 수 있도록
스스로 느끼게 해 주고 싶다.
가장 낮은 가격의 란도셀이라 해도, 형편이 어려운 일본 가정의 부모들에겐
꽤 부담스러운 입학준비가 될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익명으로 란도셀을 사서
택배로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일본에 살면서 자주 듣기도 했다.

요즘 '란도셀'에 대한 나의 이런저런 현실적인 생각에 비해,
막상 아이들은 또 참 다르게 느끼고 있다는 걸 경험한 일이 있었는데.
큰아이가 5학년 때 담임 교사와 면담을 하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미술 수업 시간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데
우리 아이가 자신의 란도셀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면서 그리더란다.
왜 이게 너에게 소중하니? 라고 선생님이 물으니,
아이는  "5년이나 저랑 늘 같이 다녀서요." 라고 대답하며
가방 테두리의 실땀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그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며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날 미술 시간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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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과정이 다 끝나고 아이가 가져온 학교 물건들 중에 들어있던 이 그림을
나는 요즘에서야 보았다. 담임 선생님이 말하던 란도셀 그림이 늘 궁금했는데
막상 보고나니, 딸아이다운 그림이라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정말 아이에겐 이 가방이 학교를 다니는 6년 내내 친구같은 존재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학년 입학할 때는 자기 등짝보다 커서, 가방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큼 작고 어렸던 아이가
이젠 초등학교 최고학년이 되어, 등 뒤에 붙은 가방이 작아보이는 13살 소녀로 자랐다.

날마다 사용하는 물건, 늘 내 곁에 있는 물건을 이렇게 찬찬히 구석구석 바라보며
아, 여긴 이렇게 생겼구나, 단추는 이런 무늬였네.. 가방끈은 이제 오래 매다보니 좀 늘어났네..
그렇게 자신의 물건과의 거리와 관계를 느껴볼 수 있다는 걸
딸아이의 이 그림 한 장으로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고가 란도셀에 대한 못마땅했던 혹은, 부럽지만 그 돈 주고는 사기싫은, 아주 현실적이고 복잡미묘했던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책가방과 함께 관계를 맺고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구나..
어른과 아이가 하나의 물건에 대해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니.

아이의 그림을 보고나니, 나도 어쩐지 딸아이의 란도셀이 새롭게 보인다.
어떤 색인지, 디자인이 어떤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에 집착했던 처음과는 달리
오랜 시간 함께 해서 이젠 정말 우리 아이 삶의 일부분이 된 듯한 존재같다고 할까.

마지막 남은 1년을 이 가방과 함께 좋은 추억 많이많이 쌓기를.
책가방아.. 우리 딸이랑 지난 5년동안 잘 지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마지막 1년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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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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