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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다웃파이어가 필요해!!"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친 게 벌써 몇 만번 째일까!

13년동안 주부로 살면서 영화 속의 그녀가 우리집에도 찾아와 주길

진심으로, 간절하게 바랬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꼭 2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내가 결혼 전인 20대였을 때,

비디오가게에서 빌려와 집에서 보게 되었다.

그때 친정엄마와 나는 거실에서 다 마른 빨래를 개며 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께서   "아!! 누가 저래 주면 얼마나 좋겠노.."

탄식하듯 혼잣말을 하시는 거다.

 

무슨 장면이길래 그러시나 다시 자세히 보니,

일에 쫒겨 지칠대로 지친 직장맘(아이가 셋)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그녀 앞에는 난장판이 된 집안이 아니라, 가정부로 들어온

'미세스 다웃파이어'(전남편이 할머니로 분장해서 잠입한 거지만) 덕분에

말끔하게 치워진 집과 아름다운 촛불이 일렁이는 식탁 위에 따뜻한 저녁식사가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고, 바로 그 장면이 일에서 돌아온 엄마의 눈시울을 적시게

할 만큼 감동하게 했던 것이다.

나의 친정 엄마도 평생 일을 하셨기에

영화 속의 엄마의 감정에 완전 공감하셨고 마지막까지 함께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땐. 결혼 전이었던 20대엔 정말 몰랐다.

내가 주부로 살면서 이토록 그 한 순간의 장면이 내 현실에도 일어나길

이렇게 자주 바라면서 살게 될 줄은.

어느 집이나 집안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힘들기 마련이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집은 자잘한 물건이 좀 지나치게 많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늘어난 물건들을 제때에 정리를 못하고 지내온 바람에 결혼 생활 10년을 넘어갈 때 쯤엔

집안이 포화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둘째가 조금만 더 크면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면서도 늘 미루기만 했는데

한 2년 쯤 전에 있었던 큰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정리정돈을 마음먹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2011년. 바로 일본 동북대지진이 일어난 해였다.

그 전부터도 일본에서는 집안 정리를 기회로 인생까지 바꿔보자 식의 청소/수납/정리정돈

붐이 일고 있긴 했지만, 그때의 지진이 계기가 되어 그야말로 열풍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인생을 바꾸는 정리정돈>이라는 내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드디어는 드라마까지 만들어 진단다.

내일이 첫방송이라는데..  

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목숨이 오가는 순간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살피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로 정리정돈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정말 영화 속의 엄마가 감동받던 장면이

바로 우리 집안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더 이상 상상 속에서 기다리지만 않고

우리 가족의 힘으로 한번 해 보자!  그렇게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2년 전만 해도 둘째가 겨우 두 돌을 지났을 때였으니

뭐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필요없다 싶은 물건을 그때그때 미루지 않고

정리해서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하는 것 정도..

 

그러다가 작년에 둘째가 유치원을 가면서 아이 둘이 집안에 없는 시간대가 생기면서,

또 이사를 구체적으로 계획하면서 본격적으로 정리정돈이 날마다의 일상처럼 되어갔다.

그래도 아이들 키우고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하니

당장 중요하지 않은 정리정돈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느려도 황소걸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하나씩 치우다보면 언젠간 끝이 있겠지..

 

누가 들으면, 무슨 정리를 몇 년씩이나 하나? 싶을지 모르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생긴 짐 이전에 우리 부부 각자의 미혼 시절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그렇다.

남편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그렇듯이 옛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고

(그러면서 잘 정리/보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편은 그 정반대였다;;)

나 역시, 고국을 떠나와 살다보니 내 나라에서 보던 책 한 권, 물건 하나도 다 추억이 있고

버린 뒤에 후회를 하면 어떡하나 싶어 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다음으로 미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식구 네 사람의 짐, 늘어만 가는 아이들 물건들,

학교와 유치원에서 가져오는 쉽게 버리기 힘든 성과물들,

더구나 아들/딸이다 보니,

서로 다른 장난감과 옷 종류 탓에 더 많은 분류와 수납 공간이 필요했다.

한번씩 마음먹고 제대로 정리된 적도 제법 많긴 한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가 너무 쉽다는 사실..

다이어트랑 똑같다..

 

그러던 중에 이사가 결정되고, 지금 살고있는 집으로 온 지 벌써 반년.

좀 더 정리해야 할 짐들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노력과 애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을 가끔 맛보고 있다.

식구들이 모두 있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흐트러지곤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리법 덕에 쉽게 정리되고, 청소도 무척 수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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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지럽히기 쉬운 둘째의 장난감과 물건은 지금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

최소한으로 내어놓았다. 아이가 잘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까지 함께 두게 되면

늘 어질러진 상태가 되기 쉽고, 그게 정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 때문에

다른 장난감은 따로 넣어두었다가 오랫만에 꺼내주면 반가워하며 잘 가지고 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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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양이 적고, 수납할 공간이 항상 같은 곳에 정해져 있으면

아이가 혼자서도 정리정돈에 익숙해 지는 것 같다.

다 놀고 난 뒤, 잠자러 가기 전에 같은 종류의 장난감을 정해진 바구니에

넣기만 하면 되니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또 거실 한복판에 잡다한 장난감이 다 보이는 수납장(반투명)이 좀 걸렸던 터라

이사온 집에선 과감하게 방에서 쓰던 옷 사랍장을 거실 한복판에 두고

장난감 수납장으로 쓰기로 했다.

마루 위에 늘어둔 장난감을 공간 여유가 있는 서랍에 넣기만 하면 말끔하게

정리가 되는데, 수납과 인테리어가 동시에 해결되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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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남에게도 주지 못하는 아이의 어릴 적 물건들이 있다.

집안 어딘가에 잘 넣어도 보관하기는 하는데, 이왕이면 꺼내두고 보면서

추억을 실감?해보고 싶기도 ..  그래서 큰아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에게

아이들이 신생아 때 입었던 내의를 입혀 보았다.

정말 이렇게 작았나??  내 손으로 키워놓고도 날마다 이 옷을 보며 생각한다.

애들이 말 안 듣고 속썩일 때, 이 인형 옷을 안고 만지며 억지 힐링을 시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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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그랬다.

호텔방 문을 열었을 때,

작은 방이라도 와..  하는 감탄사가 나는 이유는

'여백' 때문이라고.

 

정리정돈을 어느정도 현실화하고 겪어보면서 느낀 건

역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기분, 어떤 공간에서

가장 의욕이 솟고 즐거워질 수 있는지.

그 답은 역시 '여백'이었던 것 같다.

어린 아이들과 좁은 공간에서 많은 물건들에 둘러쌓여 지내기를

10년 넘게 했으니, 이젠 좀 덜어내고 싶다.. 꼭 필요한 것만 곁에 두는 것,

새로운 물건에 욕심이 날 때도, '내게 필요한 건 집에 다 있다' 라고 생각하기..

그런 단순함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대는 이제 현실이 되었고

나는 그 공간 안에서 전보다 더 즐겁고 여유있게 육아에 임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이 상태를 잘 유지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더 맞는 공간으로 가꿔가는게 중요한데

가끔은 마음대로 어질르기도 한다. 늘 한결같을 순 없으니까.

그래도 잘 치워졌을 때의 쾌적함,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함을,

그 바람과 함께 마시는 커피와 간식이 훨씬 더 기분좋고 맛있다는 걸

남편과 아이들도 이젠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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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이 영화를 다시 검색해 보니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집도 깨끗하게 치우고, 저녁 준비까지 해 두고도

글쎄 세 아이와 놀기도 열심히 했네.. 흠..

자, 그럼, 이 역할 만큼은 남편이 맡아주는 걸로~

나는 여백있는 집에서 커피 마시며 기다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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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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