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협 육아모임에서 삶은 콩을 으깨는 아이들>
된장담기는 올해로 두 번째다.
같은 생협회원이자 함께 육아모임을 꾸리는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담을 때는 솔직히 썩 내키지가 않았다.
내가 과연 된장이란 걸 만들 수 있을까?
괜히 아까운 재료만 버리는 게 아닐까?
보관은 또 어디서 어떻게 하지?
이런저런 걱정과 생협 된장도 충분히 맛있으니 조금씩 사먹으면 되는 걸
한국인인 내가 일본 된장담기를 꼭 배울 필요성도 크게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임 친구들의 열의가 너무 대단해서, 그저 속는 셈치고 해볼까..!
싶어 아이들과 함께 참여해 얼떨결에 담게 되었다.
된장같은 저장식은 만들어 금방 맛볼 수도 없으니,
내가 제대로 담은 건지 아닌지도 모른채
지지난 겨울에 처음 담은 된장을 뒷쪽 베란다에 거의 방치상태로 두었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쯤에 친구들이 벌써 꺼내서 먹고 있다는 얘길 듣고는
그동안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된장 단지를(웬지 실패했을 듯한 예감에)
드디어 열어보았다.(곰팡이 투성이거나 벌레가 생겼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아이들과 내가 삶은 콩을 으깨고 섞어 대충대충 만든 게,
봄과 여름을 지내고 정말 '된장'의 자태로 변해 있었다.
짙은 갈색의 진득함 속에 듬성듬성 박힌 콩알들이
유기농 100% 재료로 집에서 담은 된장의 위엄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성의있게 담을걸.. 하는 후회를 하며
일본식 된장국 '미소시루'를 만들어 가족들과 처음 가진 시식회.
첨가물이 전혀 안 들어간 셈이니, 잡맛(?)이 없고 너무 달고 맛있었다.
콩이 가진 본래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다시 국물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될 만큼.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 잘 먹었다.
조금 컸다고 음식 맛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도 평이 까다로운
큰아이가 제일 좋아하고 잘 먹는데,
이 된장으로 무침이나 볶음에도 아주 조금씩 살짝 넣으면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해서 맛있었다.
네 식구가 즐겨 거의 매일같이 먹다보니
몇 킬로 담은 된장이 금새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는 더 많이 담을 거라 얼마나 다짐하고 벼렀는지.
지난 겨울에는 모임 친구들이 모두 바빠 2월에서야 겨우 날짜를 맞춰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된장담을 날을 기다리고 벼렀건만, 이사준비 땜에 늘 몸이 피곤했던 나는
배달시켜둔 콩 자루와 소금의 엄청난 양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섰다.
'이사할 때 옮기는 것도 힘들텐데 올해는 그냥 넘어갈까..'
아마 나 혼자였으면 그렇게 넘기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이 반이다.
일단, 모임 친구들과 약속한 날에 눈 딱 감고 재료를 싸들고 가
콩 삶기부터 시작해 버렸다. 그러면 된장담기는 술술 진행된다.
친구들도 다들 두 번째라 긴장도 하지않고 여유만만인 모습이었다.
두 번째 된장담기에 임하는 모습이 둘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같았다고나 할까.
물에 불리고 삶기까지한 콩은 엄청난 양이라 집에서 혼자 하기엔
고독한 작업이다. 음식 만들기가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수다떨며 콩을 으깨고 소금과 섞어 치대고 하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압력솥에서 콩이 삶기는 구수한 냄새는 언제인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 저 먼 어린시절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 냄새에 취하듯 옛날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 곁에서 아이들은
푹 삶아 부드러워진 콩을 한 주먹씩 주워먹으며 놀았다.
아이들도 그동안 맛나게 먹었던 된장맛을 기억하는지 장난 반 재미 반이긴
하지만 콩을 으깨고 섞고 뭉치는 과정을 도왔다.
큰아이는 학교에서 마침 '콩이 여러 음식으로 변하는 것'에
대해 배운 직후라 교육적인 효과도 톡톡히 보았다.
대충 된장담기가 마무리된 후엔
처음 담았던 묵은 된장으로 국을 끓여 간단한 점심을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이 묵은 된장을 조금 떼어 이번에 새로 담은 된장에 섞어 담으면
우리집만의 된장 맛을 매년 이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 그렇다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된장담기를 계속해 간다면
우리 딸과 아들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도 지금 우리가 먹는 된장을 먹을 수 있는 거네?!
한번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된장 담기도 한두번 해보니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했을까'싶다.
물론 함께 즐기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된장 뿐 아니라, 해마다 한 가지씩 이렇게 어려울 거라 여겼던 제철음식이나
저장식 만들기를 배워나가면 앞으로 사는데 큰 힘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일을 통해 얻은 건 삶에 대한 자신감이다.
사람들 틈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해질 때
집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을 된장 생각을 하면,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났다.
"우리집엔 내가 담은 된장이 10kg나 있다구. 우하하.."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야기를 모은 <소울푸드>라는 책에서
'된장'에 대해 누군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아무튼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맘이 스물거릴 때
내 입에서 나오는 가장 친절한 초대의 말은
"우리집에 와서 엄마의 된장찌개 한번 먹어봐"이다.
그 말을 하고나면 나 스스로에게도 좋은 일을 한 것 같고,
그 사람도 왠지 운이 좋은 것 같고, 아무튼
서로 값진 사람이 된 듯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마당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한국 된장도 담아볼 생각이다.
계절이 바뀌는 때라 그런가. 어쩐지 나는 요즘 쓸쓸하다.
갈수록 시댁과 친정 외엔 집밥먹으러 오라는 곳이 드문 요즘,
천천히 익어가는 된장같은 관계를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과 나누며
'서로 값진 사람'이 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아이들도 그렇게 함께 하는 밥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자랐으면 하는게
이 아날로그 엄마의 소박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