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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아주 짧은 기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서로를 그닥 자세하게 알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결혼까지 수월하게

온 것인지도 모른다. ( 깊이 알았다면.....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한다. ㅋㅋ)

 

신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꾸리고 결혼한지 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남편의 역할은 단순했다.

워낙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어서 주말에나 여유있게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외출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집이나 집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절 내게 남편은 시간 있으면 낮잠이나 뒹굴뒹굴하며 텔레비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전자제품이나 물건 구입하는 것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전구를 갈거나 간단한 집안 수리같은 것은 잘 했다. 그 정도였다.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는 작은 어항에 물고기를 기르고 베란다에

화분 늘이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들이나 부모님 집에 뭔가 고칠 것이 있으면

남편이 도와주었다. 그런 일에 재주가 있었다. 그래도 그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마당과 텃밭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서야 남편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실로 경이로운 능력자였던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단독주택은 사방이 텃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윗밭이 제일 넓은데 솔직히 텃밭 농사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다.

이른 봄에 딱딱한 땅을 갈아 엎는 것 부터 무거운 퇴비 푸대를 날라 섞고

밭을 만드는 큰 일이 다 남편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돕기는 하지만

남편이 나서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

지방에서 살긴 했지만 장사하시던 부모 밑에서 농사 경험이 없던 남편은

순전히 이 집에 온 후부터 농사를 배웠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부지런히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더니

5년째에 들어선 올해는 그 어느때보다도 넓은 밭에 농사를 짓고 있다.

윗밭에 올라서면 남편의 땀이 서린 감자며, 강낭콩, 호박, 오이, 부추같은

작물들이 푸르게 넘실거리는 장관을 보게 된다.

 

 남편의 솜씨7.jpg

 

아랫밭의 상자 텃밭도 남편 솜씨가 구석 구석 베어 있다.

딸들이 아껴 기르는 딸기밭에 슬슬 외지인들의 손이 타기 시작하자 남편은

기둥을 박고 그물을 쳤다. 덕분에 학교에서 돌아올때까지 딸들의 귀한 딸기가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아랫밭 앞쪽에 만들어둔 빨간 우체통도 남편 솜씨다.

매일 새벽, 개짖는 소리를 무릎쓰고 현관까지 와서 신문을 던져주는

배달 어르신이 덜 힘들도록 언덕길 입구에 만들어둔 이쁜 우체통이다.

 

남편의 솜씨5.jpg

 

현관 앞에는 남편이 기르는 온갖 종자들의 배양터가 있다.

싹을 틔우고 충분히 자란 것들을 밭에다 옮겨 심는다.

올해 남편은 여러 다양한 종자들을  시험 재배중에 있다.

성공하면 설탕 완두콩과

단호박, 신선한 바질도 먹을 수 있게 된다.

 

남편의 솜씨2.jpg

 

탐스럽게 꽃피운 노란 백합과 패랭이꽃, 접시꽃도 남편 작품이다.

직접 만든 데크와 그 안에 서 있는 버섯 조명도 물론 남편 솜씨다.

이 집에 오기 전까지 나는 남편이 이렇게 솜씨 좋은 목수이자 정원사인줄 몰랐다.

알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남편의 솜씨.jpg

 

현관에 달아 두었던 방충문을 쥐들이 다 갉아서 못 쓰게 만든 후

현관 안으로 뱀까지 들어왔던 지난 여름,

남편은 현관 밖에 새 공간을 짜 넣었다.

덕분에 개들이며 닭들 사료를 비 안 맞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뱀이며 쥐, 걱정 없이 현관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들이며 여름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보기엔 어설프지만 아주 실용적인 덧문이다.

안에는 나무로 만든 우산통도 있고, 촘촘히 못을 달아 각종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들이 보기 좋게 걸려 있는 선반들도 있다.

나는 감히 흉내조차 못내는 분야다.

 

이 집을 발견하고, 계약하기까지 애쓴것은 내 공이었지만,

이 집을 집 답게 가꾸고, 유지하며 이만큼 지낼 수 있게된 것은 정말이지 남편 덕이었다.

목수, 전기수리공, 배관공, 정원사, 농부에 페인트 칠이며 방수 공사까지..

남편은 나는 꿈도 못 꿀 다양한 능력으로 이 집을 이만큼 이루어 왔다.

아파트에 살때는 도무지 게으르고 느린 남자라고만 여겼었는데

어쩌면 남편의 재능과 기질과 솜씨가 발휘될 일이 없는 단조로운 공동주택의

환경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나보다.

이 집에서 남편은 누구보다 유능하고, 재주 많은 가장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솜씨6.jpg

 

 최서방은 못 하는게 없다는 칭송을 친정 식구들로부터 받고 있는 남편의

신묘한 능력이 또 한번 발휘된 사건은 수도권이 제일 더웠던 지난 5일, 일요일이었다.

연휴를 맞아 아래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 가족이 놀러왔다.

친정 남동생에 엄마까지, 친정 식구들 열 명이 모인 날,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었을때 사건이 터졌다.

 

늦게 도착한 제부가 차를 언덕길로 기운차게 올려 마당으로 진입하다가

전날 모닥불 놀이를 하느라 입구쪽에 가져다 놓았던 화로를 들이 받아 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오래, 자주 써서 부식이 심했던 화로는 그야말로 납작한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 숫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야 하는데 불 피울 화로가 사라졌으니

모두가 바비큐는 글렀구나... 낙심하던 참 이었다.

 

남편은 다 찌그러진 화로를 일일이 펴고는 어디선가 짧은 철근을 가져오더니

(나는 그때까지 우리집에 이런 철근이 있는 줄도 몰랐다)

또 어디선가 가져온 굵은 철사로 철근을 꺾여진 화로에 대고 구부리기 시작했다.

다 망가졌는데 이게 고쳐지겠어.... 마뜩찮아 하던 나는 잠시 후

본래의 모습을 찾은 화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결국 그날 남편이 땀을 펄펄 흘려가며 고친 화로 위에 이글이글 숯불을 피우고

맛있는 고기를 구워서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먹으면서도 고철 덩어리가 되버린 화로를 이렇게 멀쩡하게 고쳐 놓은

최서방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냥 씨익 웃기만 했다. 

 

뚝딱 뚝딱 개집을 다시 뜯어 고치고, 뒷마당 가는 길에 온실을 만들고

마당이며 산 길에 배수로를 파고, 토마토 곁순을 따주고, 호박 덩쿨이

올라갈 지지대를 멋들어지게 만들어 세우고, 덧문에 손잡이를 달고

찢어진 방충문을 수리하고, 좁은 탁자에 나무를 덧대어 넓게 만들어 주고

정말이지 남편이 아니었다면 오로지 낭만적인 상상에만 차서 넓고 낡은

집을 얻자고 고집했던 나로서는 덜컥 집을 얻어 놓고도 관리가 어려워

오래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철 없을때 나는 키가 크고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남자를 꿈꾸었더랬다.

세련된 말씨며, 옷차림이며,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남자가 매력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나랑 살고 있는 남자는 키가 작고 굵고 짧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말씨도 세련과는 거리가 멀고, 옷차림도 수수하고,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없지만 살면 살수록 매력이 늘어나는 사람이다.

남편의 매력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내 나날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땀 흘리며 움직이고,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고,

불편한 것들을 잘 다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남자다.

무엇보다 가족이 살고 있는 터전을 지키고, 가꾸는 데 열과 성을 다 바치는 남자다.

이건 진짜 생생한 매력이다.

 

마흔 하고도 일곱이나 된 마누라가 쉰이 된 남편에게 새삼스런 매력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현대의 공동생활 구조 속에서 그런 매력을 발견하고 찾을 기회가 별로 없다.

우리는 같이 키우는 작물들이 있고, 힘을 합해야 하는 노작들이 있다.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같이 애쓰고, 의논하고, 서로 나누어서 해야 하는 일들이

계속 이어진다. 몸은 고달프고, 힘은 들지만 싹이 잘 오른 완두콩을 어디에 심을 것인지

의논하며 나이든 마누라와 남편은 더 가까와진다.

서로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영역이 있고, 그 영역에 기여하는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경이 있고, 같이 가꾸어 가는 집에 대한 책임과 애정이 우리 두 사람을 더 굳건하게

맺어 준다. 덕분에 흰머리와 주름은 늘어가도 아직 권태기를 모르고 산다.

 

결혼할때보다 지금 더 남편이 좋다.

그땐 그냥 더 나이들기 전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안도했다면, 

지금은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14년을 사는 동안 더 좋아진 남편이다. 앞으로의 세월이 더 기대되는 남자다.

 

멀리 출장간 남편대신 3일간은 내가 가장이다.

남편이 마음 쓰며 돌보던 것들을 찬찬히 보살피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돌아올땐 조금 더 매력적인 마누라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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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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