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27.jpg

 

"엄마, 내일은 조금 더 일찍 나가야겠어요"

"그래? 그 시간에 가도 늦지 않을텐데?"

"지각하기 싫어요. 저, 우등생 이미지, 오래 유지하고 싶어요"

아들의 말에 남편과 내가 빵 터졌다.

"우.. 우등생? 우등생 이미지, 유지중이니? 몰랐네.."

"훗.. 그 정도야 뭐.."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날리고 방으로 사라졌다.

우등생이라니... 우등생처럼 보이기를 원한다니... 우리 아들이...

이거야 정말 태극기라도 달 일이다. 아니, 이런 날이 다 오네.. 세상에...

 

아들은 초등 대안학교를 마치고 얼마전부터 안양에 있는 초중고통합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 전보다 한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하고 전철과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고 다녀야 하며 공부도 오후 다섯시는 되야 끝나는 꽤 힘든 생활을

시작한 참이다.

아침잠이 유난히 많아서 늘 일어나기 싫어했고, 아침밥도 콩알만큼

마지못해 먹던 녀석이다. 일반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숙제에도

입을 내밀고, 머리를 써야 하는 수학 숙제는 몹시 지겨워 하며

짜증을 내던 녀석이라 당분간 새 생활에 적응하려면 고생좀 하겠구나..

싶었다.

새로 다니는 학교는 대안 학교 중에서도 공부를 꽤 야무지게 시키는

학교다. 숙제도 많아서 본격적인 일상이 시작되면 집에 와서도 한 눈

팔 새가 없을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던게 사실이다. 워낙 느슨하게 지내던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입학식 마치고 바로 2박 3일의 학교 여행을 다녀온 후

시작된 학교 생활 이틀만에 아들의 입에서 우등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지각도 하기 싫고, 숙제도 꼬박 꼬박 해 가고 싶단다.

실제로 아들은 이틀 내내 숙제가 있었는데 불평없이 열심히

해 갔다. 수학 숙제는 밤 늦도록 이불 속에서 아빠와 함께 풀었는데

전같이 짜증내고 힘들어 하는 소리가 없었다.

모르는 건 물어보고, 설명해주면 다시 해보려고 하고, 도와주는 것에

고마와 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아들 키우면서 우등생은 꿈도 꿔보지 못하고 그저 다니는 학교만

좋아해주기를 바랬던 우리 부부로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얼이 빠질 지경이다.

 

어제는 학교에 다녀와서

"엄마, 저 핸드폰 없어도 되요. 핸드폰 따위,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대신 용돈이나 좀 올려주세요" 하는 말로 우리 부부를 또 한번

놀래켰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핸드폰이 생긴다고 철썩같이 믿고 지냈던 아들은

입학한 학교가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교칙이 있어서 핸드폰을 사 줘도

투지폰 일거라는 내 말에 며칠을 방방 뛰며 난리를 쳐 댔었다.

집을 나가겠다는 둥, 죽고 싶다는 둥, 생난리를 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어서 스마트폰에 대한 욕구를 조절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던 참인데 등교 이틀만에 핸도폰이 필요없다는

선언을 하니 입이 딱 벌어졌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용돈을 올려주기로 했더니 아들은 기분 좋게

제방으로 사라졌다. 우리 부부는 요즘 아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가지고

둘이서 오래 쑥덕거렸다.

 

결론은 이렇다.

아들은 새 학교를 진짜 좋아한다.

입학 허가를 받은 후에 학교 축제에 초대받아 온 가족이 함께

구경을 갔는데 무대 위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학교 선배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필규는 곧 이어질 4주간의 계절학교를

고대했었다. 방학을 하면 열시, 열한시까지 늦잠을 자던 녀석이

방학 기간 중 4주씩이나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 이어지는

계절 학교를 기다려서 다닌 것이다.

어려운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악기를 배우고, 발표를 하는 과정속에서

아들은 선배들과 아주 친해졌다.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또래 친구와 선배가 없던 터라 멋진 선배들이

많은 새 학교가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선배들도 필규를 무척 아껴 주었다. 키크고 잘 생기고 아는 것도 많다는

말도 들은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와 '씨네 21'을 애독했던 아들은 선배들이

관심있는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는데 그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나보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들을 움직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처음에

주었던 좋은 이미지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다른 힘든 과정들에도 열의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학년의 구분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과정을 배울 뿐이다.

아들은 자기 수학 수준이 낮다고 했다. 당연하다. 일반 학교로 치면

초등 4학년 정도의 수준만 마치고 아들은 졸업을 했다.

"이번 학기만 지나면 저도 중등과정 수학에 들어갈 수 있어요"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즉 빨리 노력해서 그 과정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숙제를 해도 불평이 없다. 제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 이니

어렵고 힘들어도 애쓸 뿐이다.

하고 싶은 일에는 놀라운 집중을 보이지만 마음이 없으면 천둥 벼락을

쳐도 끄떡없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강력한 동기가 생긴 것이다.

멋진 선배들과 열정 넘치는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말이다.

제 나이에 맞는 과정을 배우고 싶고, 절대 그 수준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학교에 며칠 다녀보니 선배들은 핸드폰 없이도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스마트폰만 가질 수 있다면 서울대라도 갈 수 있다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며 큰소리치던 아들은 선배들처럼 저도 스마트폰 따위 필요 없다며

콧방귀를 날리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싶은 마음이

이루어낸 기적이라고나 할까.

 

필규 36.jpg

 

그래서 요즘 아들만 보면 이뻐 죽겠다.

남편하고 아들 얘기 하며 실실 웃는 일이 잦아졌다.

남들은 중학생만 되면 괴물로 변하고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아이들 때문에

고민이라는데 우리 부부는 아들과 더 관계가 좋아졌다.

 

이번 주말에 갑가기 강릉 시댁을 가게 되어서 토요일 야구 클럽 활동을 몹시

아끼는 아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엄마, 당연히 할아버지 뵈러 가야지요. 야구보다 할아버지가 더 소중하잖아요"

한다.

우등생 이미지는 알겠는데 이젠 효자 이미지까지 유지할 셈인거냐, 아들..

살살 변해다오, 머리가 다 어지럽구나.

오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다니..

아들이 보여줄 또 다른 모습들에 남편과 나는 눈을 빛내고 있다.

신나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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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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