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jpg

 

처녀적엔 음악과 영화, 공연, 전시회같은 것들을 정말 좋아했었다.
연애도 잘 안되던 그 시절엔 주말마다 시간이 넘쳤다. 돈도 같이 넘치면 좋겠지만
박봉을 받는 시민단체 직원인지라 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가을이면 대학가에 각종 학내 연극팀과 오케스트라의 공연들이 이어졌다.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정기공연은 미리 신청을 하면 무료 티켓을 받을 수
있었는데 수준이 높았다. 야외공원이나 강당에서 열리는 공연정보도
늘 꿰고 있었다. 하다못해 대학로나 인사동 길가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팀들의 거리공연도 흥겨웠다.
가끔 정말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돈을 아끼고 아껴서 달려갔다.
큰 돈이 뭉텅 들기도 했지만 정말 원하던 공연을 보고 오면 오래 오래
그 기쁨과 감동에 취해서 살았다. 그땐 정말 그랬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고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일이 어려워졌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입장할 수 있는 공연도 없었거니와 혹 야외공연을
볼라치면 보채거나 지루해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성화인 아이를
챙기느라 제대로 볼 수 가 없었다. 집에서 CD나 DVD등으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긴 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생생한 감동이 늘 아쉬웠다.
어서 어서 아이들 키워서 내가 좋아하는 공연 좀 보러 갔으면...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그러던 중에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국내에서
초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DVD에서 외국 배우들의 공연만 보곤 했는데
우리 배우들이 우리말로 공연을 한다니, 너무 너무 궁금했다.
슬슬 보고 온 사람들이 리뷰를 올리는데 하나같이 정말 멋지고 좋았다는
얘기들이 넘쳤다. 정말 보고 싶었다. 나랑 이 뮤지컬 영상을 같이 보며
좋아했던 아들과 함께 하면 정말 좋을 듯 싶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두 아이들을 봐 줄테니 보고 오란다.
그동안 강의하러 다니고 원고 써서 받은 돈도 있으니 맘 놓고 볼만했다.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 무려 한 자리에 9만원이나 하는 티켓 두장을
끊었다. 내 돈 내고 보는 가장 비싼 공연이었다.

마침 공연이 열리는 용인에는 윤정이와 이룸이가 너무 좋아하는
경기도 어린이박물관도 있어서 두 딸은 남편과 그곳에 있고
그 시간동안 나는 필규와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용인으로 향했는데 차 안에선 아무렇지 않던
이룸이가 막상 공연장 앞에서 나와 필규만 내리려니까
저도 같이 간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울며 매달리는 아이를
억지로 차 안에 떼어 놓고 도망치듯 아들 손을 잡고 달렸다.

꼭 나쁜짓을 하는 것처럼 맘이 편치 않았다.

도로가 막힐까봐 일찌감치 나오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지라
허둥지둥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를 먹고 들어갔는데
9만원 짜리 좌석은 1층 맨 끝이였고 배우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눈 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넋을 빼앗기며
빠져들었는데 컵라면을 먹을때 맵다고 연신 물을 들이키던
아들은 극이 한창 재미있어 질 무렵부터 오줌이 마렵다고
안절부절이다. 참아보라고 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하며
야단을 한다. 할수없이 내보냈더니 쉽게 다시 들어오지를 못한다.
한참 후에야 뒤늣게 도착한 관객들 틈에 섞여 다시 돌아왔다.
이젠 좀 집중해서 볼 수 있을까 했더니 아들은 이번엔 특유의 독한
개스를 뿜기 시작한다. 내 아들이 아닌척 했지만 신경이 쓰여서
무대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가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뮤지컬이지만 쉬는 시간을 합쳐 세시간이나 되는
긴 공연이다보니 녀석은 중간쯤 지나자 '언제 끝나요?' 묻기 시작한다.
장발장의 고뇌와 코제트, 마리우스 커플의 애절한 사랑에 막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아들은 벌써 나가고 싶어한다.
에고... 돈 아까와라.

열살이면 엄마와 이 정도 공연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니..
했는데 내 생각이었나보다. 줄거리도, 노래도 다 아는거라
재미나게 즐기려니 했었는데 힘 넘치는 열살 사내아이가
집중하기엔 너무 긴 공연이었다.
어렵고 힘들게 큰 돈 써가며 좋은 공연 보여주었더니
아들은 공연 얘기엔 관심없고 그 다음날이 게그콘서트 하는 날이라고
좋아한다.  아아... 정말 돈 아깝다.

 

이룸이 떼어놓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핸드폰까지 남편차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공연이 끝난 후에는 남편에게 연락하느라
모르는 사람에게 세 번이나 핸드폰을 빌려야 했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 남편을 만났더니 엄마를 찾던 이룸이는
윤정이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마누라가 뮤지컬 보는 동안 어린 두 딸 데리고 다니며 시중을
들었던 남편도 퍽이나 고단한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문화생활 즐기겠다고 애들과 남편을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었다. 아직 멀었구나. 한숨이 나왔다.

다시 모인 가족과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왔더니
힘든 일 하고 온 것처럼 몸이 고단했다.


그날 저녁 TV에선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날 팀이 7년만에
내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 흘러 나왔다. 아아.. 너무 너무
좋아하는 공연인데 정말 보고 싶은데 차마 말이 안 떨어진다.

애들 어지간히 키워놓고 남편과 손 잡고 이런 공연 느긋하게
보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할까.

 

뽀로로 말고, 딩동뎅 유치원에 나오는 번개맨 말고, 로보카
폴리나 뿡뿡이 공연은 10년 동안 신물나게 많이 봤는데
이젠 정말 애들 좋아하는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것 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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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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