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한번 토요일 오후 일곱시부터 아홉시까지 마을 독서모임에 참여한다.
올 1월에 시작한 모임에 벌써 열달째다.
그동안 꽤 어려운 책들도 함께 읽었지만 무엇보다 각자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다.
모임을 하는 두 시간은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책과 인생과 서로에
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늘 부족했다.
아쉽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일어나던 중에 가을로 접어들면서
우리집 넓은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모닥불가에 앉아 긴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밥과 김치를 준비하고, 남편은 불을 피우고, 손님들이 고기와
과일과, 와인을 가져오자 풍성하고 즐거운 파티가 되었다.
파티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는데 회원중에 기타를 아주 잘 치는 분이 있어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처음 한 두 번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다 였지만 모임이 계속 되면서 독서모임다운 문학의 향기를 나눠보자는
의견들이 모아졌다.
그래서 얼마전 모닥불 모임은 '시가 있는 저녁'으로 주제를 정하고
각자 좋아하는 시를 한, 두개씩 암송해와서 들려주고 소개해주기로 하였다.
독서모임 회원들 답게 참석한 사람들은 다양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유난히 독서를 많이 하고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한 회원은 귀한 판본의
초판 시집까지 가져와 보여주며 자신이 사랑하는 시를 들려주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한자 한자 마음을 다해 시를 낭독하는 동안 윤정이는 작은 램프로 시집을
밝혀 주었고, 다른 이들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으며 시를 음미했다.
독서회원인 아빠를 따라 참석한 중학교 2학년 태영이는 필규가 다니는
학교를 졸업한 형아였는데 다니는 대안중학교 '시 수업' 시간에 배웠던
'정지용'의 '유리창'이란 시를 짤막한 소개와 더불어 암송해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항과 까칠함의 대명사 중2의 사내아이로부터
듣는 정지용의 시라니..
- 유리창 -
정 지 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 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는 담담한 설명과 함께
열다섯 소년이 들려준 이 시는 어른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그렇구나. 중2 사내아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시수업이 있구나..
진정한 문학은 질풍노도의 사내아이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구나..
태영이의 시에 화답하는 시들이 이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김소월의 '초혼'을 들을 수 있었고
유치환과 안도현과 곽재구의 주옥같은 시들이 흘러 나왔다.
어른들 곁은 마음대로 뛰어 다니며 불도 쬐고 이야기도 듣는 아이들도
이따금 귀를 기울여 시를 듣고 있었다.
여섯살 이룸이는 유치원에서 배운 '바사삭 바사삭'이란 동시를 들려 주었고
나와 함께 '애기똥풀'이란 시를 암송해서 큰 박수를 받았다.
얼마나 많은 시들이 읽혀지고 말해졌는지... 얼마나 많은 감동과 기쁨이
있었는지, 얼마나 즐겁고 유쾌하고 그리고 행복했는지...
밤 깊도록 시와 노래와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어른들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놓여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마음의 허기를 나누고,
새로운 힘을 얻는 그런 시간들이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어른들이 제대로 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업무, 퇴근후에도 회식과 미팅같은 업무 중심의
모임이 늦도록 이어진다. 그런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놀이도 술이나 노래방 같은 유흥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것도 어려운 사람들은 스마트폰같은 것들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취미와
즐거움을 소비한다.
넓은 마당에서 즐겁게 소통하고 나누며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은 캠핑장이나 가야 가능한 놀이일것이다.
마당이 있는 집을 얻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 우리집 마당이 즐거운 소통과
놀이와 환대가 넘치는 공간이기를 바랬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부르고 불을 피워가며 자리를 마련했다.
아이들의 친구, 그들의 부모들, 마을 사람들, 조카의 친구들, 남편 회사
동료들, 동창들, 누구에게도 우리집 마당은 열린 공간이었다.
넓고 트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새롭게 놀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른이란 가면 아래 여전히 숨쉬고 있는 발랄한 아이의 기운을
서로 보여줄때면 우린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친구로 어울릴 수 있었다.
이번 독서모임의 모닥불 모임은 건강하고 즐겁게 어울리는 어른들의
놀이가 자연스레 아이들도 이끌어 주는 기운이 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자리였다.
부모와 아이가 시를 통해 만나고,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자리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른이 아이한테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잘 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즐겁게, 건강하게, 충만하게 잘 노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꼭 돈이 많이 들고, 비싼 무엇이 필요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풍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알게 해줘야 한다.
집에서 수없는 모임과 놀이를 만들어 오는 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제대로 노는 모습이었다.
가끔 술을 마시지만 지나치지 않고, 어른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며 서로에게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자리..
살아갈수록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내 집이, 우리의 마당이 모든 이들의
기쁨과 즐거움,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를 소망한다.
가을비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따스한 모닥불의 온기가 더욱 절실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
다음엔 영화와 음악이 있는 저녁을 만들어 볼까.
나는 또 즐거운 난장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