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싸웠다.
3일째 우린 한 집안에서 두 개의 섬처럼 지내고 있다.
종일 떨어져 있다가 밤 늦게 만나도 서로 눈길을 마주치는 일 없이 그 옆을 지나다녔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만 바닷물처럼 찰랑이며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을 빼고 나면 우리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잘못은 둘 다 했을 것이다.
싸움이라는게 한 사람만 잘못하는 것으로 일어날 리 없다.
나는 본래 불편한 관계를 잘 참지 못한다.
부부싸움 하고 나서 며칠씩 말을 안 하고 지내는 여자들도 있다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몸으로 바로 드러나는 사람이라서 어떻게든 풀어내지 않으면 지낼 수 가 없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날들이 3일째 지나고 있다.
결혼하고 나서 이렇게 오래 지내보기는 처음이다.
늘 내가 먼저 손 내밀었다.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풀지 않고서는 지낼 수 가 없어서
돌아선 남편에게 먼저 말 걸고 내 안에 있는 걸 다 쏟아내곤 했다.
남편은 그러고나서야 미안해...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12년을 살았다.
이번에도 그러면 되는데..
우린 며칠째 섬처럼 가까와지지 못하고 있다.
이번 만큼은 남편이 먼저 내게 사과해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먼저, 이번 만은 꼭 그래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결혼하고, 살림을 늘리고, 세 아이를 낳고, 큰 집을 얻고...
12년간 우린 남 보기에 정말로 평탄한 생활을 이어왔다.
그렇지만 물질을 이룬 만큼 서로의 마음안에 가까와졌던가.. 를 생각하면 문득 자신이 없다.
남편과 한 번씩 싸울때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너무 낮설어서 당황하곤 한다.
우린 서로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퍼뜩 깨달아져서다.
겨우내 메말라있던 나뭇가지마다 생기가 돌고,
단단히 입 다물고 있는 목련 봉우리가 환하게 벌어진 봄날의 마당에 서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마음의 겨울을 지내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너무 딱했다.
그 사이에도 나는 월요일엔 밤 열시 넘어까지 큰 아이 학교에서 부모회의를 했고,
화요일엔 요가 첫 수업에, 윤정이네 반모임에,
마을협동조합 자원봉사를 하며 바쁘게 다녔다.
큰 아이 이야기도, 윤정이네 반 엄마들 이야기도, 애들의 일상에 대해서도
남편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말들은 한 마디도 우리 사이를 편하게 건너가지 못했다.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 부부란 얼마나 공허한지,
그렇게 지내는 시간들이 얼마나 지옥같은지 매일 겪고 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내내 화를 내고 있었다. 사실은 나 자신에게 벌 주고 있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그래도 새벽이면 일어나 남편의 아침거리를 차려 놓았다.
늘 하던 일을 변함없이 하는 것이 나로서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인데 남편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나면 나는 또 다시 상처를 받곤 한다.
애쓴 만큼 남편이 더 미워지고 그러면서 남편의 말을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 있으니 실망하고, 실망은 다시 미움이 되고..
지독하게도 어리석다. 이 나이 먹도록 이토록 못나고 어리석다.
아범을 왜 이렇게 키우셨어요..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하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냥 입만 다무는 것으로 상대방도 벌 주고, 자신도 벌 하면서 지내도록... 왜 이렇게 키우셨어요..
나는 하늘나라에 있는 어머님께 따지며 울었다.
우리집 남자들이 원래 다 그래.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을 못해.
그렇다고 자꾸 타박하고 구석으로 몰지말고
조금만 참고 풀어주면 된다. 왜들 그렇게 마음과 다르게 행동을 하는지...
힘들어도 니가 먼저 다독거리고 살아야지..
어머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요...
이게 다 어머님이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 거라구요.
조금 더 살아계셔서 아범들을 가르쳐주셔야지요..
엉엉울며 하늘나라에 있는 어머님을 원망하다가..
그렇구나..
남편은 엄마 없는 아들이구나..
이담에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 우리 아들이 마누라랑 싸우고
풀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으면 도울 수 도 없으면서
나도 맘 아플텐데...
나 역시 며느리한테 조금 더 따듯하게 보듬어주기를 바랄텐데..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나이들 수록 마음도 무두질을 할 줄 알아야지요.
거친 가죽도 수없는 무두질을 통해 부드러운 살갖이 되는 거잖아요.
원래 그러니까 늘 그대로 있으면 안되는거잖아요.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겉 껍질도 조금은 말랑해져야지요.
힘들수록, 미안할 수록 겉은 더 단단하게 싸 버리는 조개처럼,
여리고 부드런 속살을 감추기만 하고
딱딱한 껍질로 허세만 부리고 있으니 딱하고 가엽다. 내 남편...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잘 못한건가.
남편의 껍질을 12년 동안 여전하게 둔것이 내 잘못인가.
그렇구나. 4년 전에도, 7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우리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우린 그날로부터 한 걸음도 제대로 못 나가고 있었구나.
문득 우리 두 사람.. 막막해진다.
새벽이 지나고 새 날이 왔다.
밤새 기침하던 윤정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엄마..'부른다.
정신이 번쩍 난다.
그래, 그래... 내가 엄마지..
세 아이들의 엄마지..
내 감정에 빠져서 내가 얼마라는 사실을, 그렇게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란 걸 잠시 잊었구나.
어른이니까, 부모니까, 엄마니까.. 내 감정대로만 살 수 없다는 걸,
나는 아이를 낳자마자 알았는데
제 뱃속 열어 생명하나 내어놓지 못한탓일까.. 남편은 아직 모른다. 모르는 것 같다.
아아..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뜨끈한 국 끓여놓고 일찍 와서 먹으라고 하고, 다 먹었으니 마누라한테 사과하라고 큰 소리 치면서
담에 또 그러면 집 나가버릴꺼라고 결코 하지도 못할 일을 땅땅 뱉어내면서
한바탕 울다가 웃으면 되는 것을..
이 나이 먹도록 이토록 어리석게 이런 글을 이 아침에 나는 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