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밤 8시 반을 넘어서면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쫒기는 기분이 든다.

자유자재로 놀고있는 아이들을 얼른 침실로 몰아넣어 취침모드로 돌입하게 해,

늦어도 9시 전후에는 재워야 내일 하루의 출발이 순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놀다 자려는 아이들을 제발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나는 그림책을 자주 읽어준다.

그런데, 이런  '아이 재우기+책 읽어주기'  일을 10년 째 하고 있자니

솔직히 좀 피곤하다. 무슨 책이든 좋아하는 큰아이에 비해 작은 아이는

그림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침대 위를 걸어다니거나 난데없이 구르거나

책을 보는 누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장난감을 다시 가져와

침대 위에서 새롭게 놀이판을 벌이기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결국, 누나의 짜증+엄마의 잔소리+둘째의 통곡으로

침실의 불은 꺼지고 강제적인 수면환경이 조성되고 만다.

그러던 차에 서천석 님의 그림책에 대한 글을 읽으니 우리집만

그런게 아니구나 싶어 웃음이 났는데.

-------------------------------------------------------------------

"물론 부모들이 가진 로망도 있다. 아이가 자기 전 침대맡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고 부모는

눈 감은 아이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아이는 살짝 눈을 뜨고는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부모도 아이 볼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인사한다.

그러곤 이불을 덮어 준 다음 불을 끄고 나온다.

물론 이런 로망은 현실에서 잘 이뤄지지 않는다. 아이는 그림책을 한 권

읽어주었다고 해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오히려 때는 이때다 하며

"한 권 더!"를 외치기 마련이다. 부모는 그림책을 읽어주다 목소리가

쉬지 않을까 걱정하고, 이 아이는 왜 만족이 없는 것일까 걱정 반 짜증 반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하루의 육아 노동을 마무리한다."

                                                             - <창비어린이/ 2012 겨울호> 중에서 -

 ----------------------------------------------------------------------

 

큰아이는 책에 집중을 아주 잘 했지만, 끊임없이 "한 권 더!"를 외치는 스타일이었고

작은 아이는 읽어주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관심없는 내용이면 금방 외면하는 스타일.

근데 둘 다 공통점은 어떻해서든 잠자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뒤로 늦추려는 수작이라는 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또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잠들기 전 책 읽어주기'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번이 되곤 했다.

 

그러던 중에 신문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글을 하나 발견했다.

일본의 아주 유명한 시인이자 어린이책 번역가인 분이 <목소리도 일종의 스킨쉽>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는데, 부모의 목소리 자체가 아이들에겐 스킨쉽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주거나 힘들 땐 무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부모도 마음이 내킬 때

즐거운 마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줘라 - 하는 내용이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 이후로 곰곰히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 무리해서 책을 읽어주기는 싫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중요하다.

- 불을 켠 채, 읽어주다 보면 잠이 오기보다 더 아이들을 흥분시키는 경우가 많다.

- 그러니 침실에 들어서자말자, 불을 끄고 할 수 있는 읽어주기/들려주기는 없을까

- 아니 참, 불을 끄고 어떻게 이야기를 들려주나? ...  아! 한가지 있다!

- 옛날이야기 들려주기다!!!  책을 보면서 하지 않아도 되니 불을 끈 채, 옛이야기 들려주기!

 

그때서야 한국에 다니러 가면 가끔 들르는 어린이서점의 '옛이야기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요즘 아이들은 그걸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야기만은 그렇지 않다. 듣는 것은 누구나 좋아한다. 더구나 옛날이야기는.

그곳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는 책을 보면서 그대로 읽는게 아니라

이야기 한 편 한 편을 완전히 자기것으로 소화해서 아이들에게 입말로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문자나 영상을 볼 때와는 다르게 자연히 상상을 많이 하게 된다.

 

_1_~1.JPG

<한 어린이서점의 옛이야기 할머니. 어른이 들어도 너무 재밌다>

 

역시, 육아는 부모인 내가 먼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면 된다 생각하니

우선 '편하겠다!(^^)'싶어 마음이 가벼웠다.

그날 당장, 밤 8시 반이 되었을 때

"오늘부터 옛날이야기 들려줄꺼야. 무서운 걸로 할까?"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긴장 반 두려움 반의 표정을 한 아이들이 얼른 침대로 뛰어갔다.

흠, 역시 먹히는군.

방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깜깜하게 불을 끄고,

호랑이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는데, 실감나게 어흥...하며 호랑이 소리를 흉내내니

어둠 속에서 그 소리가 무서웠는지

늘 침대위에서 천.방.지.축이던 아들아이는 벌써 이불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이야기 한 편이 끝날 때까지 이불 뒤집어 쓴 채 둘째는 그대로 잠들고

큰아이는 너무 재밌다고 하면서, 자기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얘기해 줄께-

하면서 이런저런 학교에서의 에피소드들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이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잠을 청했고

나는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문득, 마음이 짠... 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왤까.

산만한 일상이다보니 진심이 담긴 이야기와 그걸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하루의 한 순간을 만드는 것도 내가 잘 못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 넷을 키우는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는데

"아이를 키울 때, 뭐가 젤 힘든지 아니?

 아이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주는 거야. 1시간 듣고있어도

 내용은 - 개미가 요기에서 조기까지 기어간 - 그런 이야기뿐인데

 그래도 그런 걸 잘 들어줘야 하는게 부모역할이야."

 

아. 그래서 목소리가 스킨쉽의 일종이라 했던 걸까.

오랫만에 그림책을 통하지 않고 말하듯 그대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 자신도 잠깐이지만 차분하게

옛 사람들과 그 시대의 감성에 젖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아이들과 이렇게 어떤 매체를 사이에 두지 않고도

'목소리만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새삼스러웠다.

그 뒤로 우리집은 요즘 옛이야기 붐이다.

집안 곳곳에 옛이야기 책이 널려있고

못하고 그냥 자는 날도 있지만, 가능하면 나는 한국의 옛이야기를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은 일본의 옛이야기를 잠자기 전에 들려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든 일본이든 옛이야기 대부분이

가난과 먹을 것, 그런 어려움을 나누고 이겨내는 사람들의 삶과

그런 삶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라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건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거잖아?!

골고루 잘 나눠먹을 수 있는 사회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지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전히 꿈꾸고 있다.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힘든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고 삶의 비밀을 자기 힘으로 하나씩 풀어갔다.

결국 그런 주인공들만이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해 질 수 있다.

 

꼭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지난 것들을 가까이하고 잘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가 보다. 지금을 더 잘 보게 해 주니까.

아이들을 단시간에 재빨리 재울 잔머리 굴리기로 시작했던 옛날이야기가

어느샌가 나의 지금 삶의 숙제를 하나씩 풀어주고 있는 걸 느낀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가 -  2013년 나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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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책 몇 권을 읽으며 그날에 맞는 이야기 하나를 골라 들려준다.

   계절이나 아이가 요즘 처한 상황, 갈등, 관심분야, 넘어야 할 과제 등과

   연관된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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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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