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이 사시던 강릉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몇 있었다.
콩쥐가 물을 채워 넣느라 애썼던 것과 똑같이 생긴 커다란 물항아리며
나무로 깎은 함지박같이 정말 옛날 물건들도 있었지만 초기에 나온 싱거미싱이나
구식 괘종시계같이 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린 시절에 보았음직한 것들도 있었다.
바느질을 좋아하는 형님은 언젠가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싱거미싱은 당신이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만약 내게도 그런 선택권이 온다면
한가지는 마음으로 점 찍어 놓은 것이 있었다.
작은방에 있던 앉은뱅이 책상말이다.
그 책상위에는 아주버님이 오래전에 가져다둔 커다란 구형 텔레비젼이 올려져 있었다.
내가 시집갔을때부터 그런 상태여서 누구도 그 책상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물건을 올려둔 받침대 정도로 여길 뿐 이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텔레비젼보다 그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만든 앉은뱅이 책상. 옛날 드라마를 보면 단칸방에 사는 아이가 저런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곤 했었다.
주로 밥상을 펴 놓고 공부하다가 초등학교 고학년때 아빠가 제대로된 책상을 사주었던
내 어린시절에는없었던 물건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데다가 작은 서랍이 다섯개나 있고 양은재질의 서랍손잡이까지 있다는
것이 더 맘에 들었지만 이 책상을 꼭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데는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이어령'님의 수필 '삶의 광택'중의 몇 대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나는 후회한다. 너에게 호마이커 책상을 사 준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나무 책상을 사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어렸을 적에 내가 쓰던 책상은 참나무로
만든 거친 것이었다. 심심할 때, 어려운 숙제가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나는 그 참나무 책상을 길들이기 위해서 마른 걸레질을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문지른다.
그렇게 해서 길들여져 반질반질해진 그 책상의 광택 위에는 상기된 내 얼굴이 어른거린다. -
그랬다. 아주 오래전에 배웠던 이 글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아들에게 애써 광을 낼 필요가 없는
인공광택이 나는 호마이커 책상을 사준 것을 후회하며, 어린 시절 거친 참나무로 된 책상을
정성껏 문지르던 추억을 그리워하는 아빠의 고백을 담은 글이다.
뭐든지 내 노력으로 손길과 정성을 보태며 길들여가는 물건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아쉬워하는
작가의 마음은 '호마이카 책상'이라는 잊을 수 없는 단어와 함께 내 마음에도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 글에서 느꼈던 감정이 앉은뱅이 책상을 본 순간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래.. 이 책상 하나쯤은 내가 가지고 싶다... 생각했다.
그리고 올 3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이 모여 본가의 살림을 모두 정리할때
나는 이 책상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물건이기에 앉은뱅이 책상은 용달차에 실려 어머님의 장롱과 함께
우리집으로 왔다. 제법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이다보니 마땅히 둘 곳을 마련하는데 시간이 걸려
그냥 거실 한 구석에 한참 놓여 있었는데 마침내 사달이 났다.
종일 집안을 정리하느라 바쁘고 고단했던 날이었다. 그러다보니 저녁이 늦어 주방에서
동동거리며 서둘러 반찬을 만들고 있는데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리좀 가라고!"
"니가 더 가면 되잖아!"
"내가 처음부터 여기서 하고 있었잖아!"
"나도 여기서 할꺼라고! 너 혼자만 쓰는거 아니잖아!"
"내가 하고 있었잖아. 저리 좀 가라고!"
"나도 할꺼니까 니가 가라고!"
윤정이와 이룸이가 앉은뱅이 책상에 나란히 붙어 앉아 박박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간에 다툼이 있을때 어른이 나서서 심판 노릇을 하는 것이 제일 안 좋다는 말을
지키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한동안 지켜만 보는 편이다. 그런데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반찬은 더디고 나는 힘들고 배가 고픈데 내가 만들고 차려야 저녁을 먹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서두르며 애써야 하는데 딸들의 고함소리는 더 커지고 밀려오는 짜증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리집에 좋은 탁자가 많은데 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면 안될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조용하게 제안했다.
"싫어요"
"여기서 할래요"
역시 안 통한다.
"그럼, 이룸이가 조금 옆으로 옮겨주면 어때, 언니도 같이 하게.."
"제가 먼저 하고 있었다고요, 언니가 나중에 왔고요. 왜 내가 옮겨요"
"야, 니가 책상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잖아. 너 때문에 나는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니가 가라고!"
"싫다고!, 언니가 나중에 왔으니까 언니가 가라고"
아아.. 머리가 아파온다. 꽥 소리를 질러 둘 다 쫒아버리고 싶지만 배운게 있어 그렇게는 못하니
더 짜증난다.
"누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없을까? 이렇게 계속 싸우는거 서로 힘들지 않니?"
"네, 나은 생각 못하겠어요. 그냥 이 책상에서 하고 싶다고요!"
"저도요!"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화를 꾹꾹 누르고 있는 엄마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이 두 딸은 내 앞에서
또 소리를 질러가며 서로의 몸을 밀어대고 있다. 이러다가 조만간 주먹이 오갈 판 이다.
볶다가 온 어묵이 후라이펜에서 타고 있는 냄새가 난다. 아, 안되겠다.
나는 마침내 필통에서 색연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좋아. 둘 다 누구도 양보하고 싶지 않단 말이지. 그럼 이렇게 해보자. 아주 유치한 방법이긴 한데
너희가 똑같이 고집을 부리니까 어쩔 수 없네. 엄마가 이 책상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줄테니까
각각 자기 자리에서 한 번 해봐"
그리고 나는 책상 가운데를 색연필로 그었다. 딸들은 내 손길을 바라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소파에 누워있던 필규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책상을 색연필로 그으면 어떻해요. 안 지워지잖아요"
"뭐라고?"
"책상에 낙서하면 안된다면서요. 그런데 엄마가 지금 책상에 색연필로 선을 긋고 있잖아요"
이건 도대체 또 무슨 상황인가.
여동생들의 지긋지긋한 싸움에 넌더리가 나서 하다하다 생각해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낙서타령이라니..
"색연필로 살짝 그었어. 매직스펀지로 지우면 바로 지워진다고"
"매직스펀지로 지우면 책상에 해 놓은 도색까지 같이 지워진다고요.
그러니까 색연필로 그리면 안 되죠"
아아아..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것 같다.
필규는 늘 이런식이다. 느닷없이 끼어들어 문제의 핵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그 탓은 모두 내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필규야, 지금 동생들이 싸우는 것 때문에 엄마가 나선거잖아. 이런 방법이 현명한게 아닌건
엄마도 아는데 도무지 동생들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서 마지못해 생각해낸거야.
엄마랑 동생들 문제는 우리끼리 알아서 하게 나둬, 니가 끼어들지 말고.."
"그러니까요, 그 책상이 엄마것도 아니잖아요. 같이 쓰는거라면서요. 그러니까 엄마 맘대로
색연필로 그으면 안되는거죠"
필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끝까지 제 할말을 다 한다. 엄마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지금 엄마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따윈 생각하지도 않는다.
화나나고 미워서 머리가 터질것 같다.
"이건 지금 너와 엄마의 문제가 아니잖아. 동생들 다툼을 엄마 나름대로 해결하는거야.
부족하든 맘에 안 들든 니 문제가 아니니까 끼어들지말아. 니가 그렇게 해 버리면 엄마의
훈육이 아주 우스워져. 니가 나서서 엄마를 흔들지말라고!"
나는 참지못하고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 버렸다.
"지금 이게 엄마랑 저랑 싸우고 있는 거거든요?"
"그만해!!"
필규는 화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오빠와 엄마의 싸움이 되버리는 순간 두 딸들은 조용해져서 자기들 방으로 사라졌다.
이럴땐 정말 내가 때리지 않고 아들을 키워서 이런걸까, 제 의견을 존중해준다고 하면서 키웠는데
이렇게 엄마를 무시하고 제 할말을 다하는게 내가 잘못키운건가 싶어 머리가 터질것같다.
나는 창가쪽에 있던 앉은뱅이책상을 거칠게 끌어내어 서랍속에 딸들이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다 쏟아 놓았다.
"전부 다 치워. 앞으로 이 책상은 아무도 손대지마. 엄마가 할머니집에서 가져온거야.
에어콘도 텔레비젼도 값나가는거 다 큰엄마 주고 엄마는 이거 하나 가지고 싶어서 가져왔어.
아빠들 어린시절에 공부했던 책상이라서.. 이것때문에 너희들이 더 싸우고 사이가 안 좋아지라고
가져온게 아니라고..
엄마가 쓸거야. 엄마 책상 할꺼야. 너희들은 쓰지마!"
애써 현명하고 지혜로운 엄마인척 하느라 참고있던 화를 아이들앞에서 더 유치하고 미숙하게
폭발시키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나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눌어붙기 시작한 후라이펜을
뒤적였다. 속상하고 화나고 부끄럽고 나 자신이 한심해서 내가했던 행동과 말들을 모두 복기하느라
오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달의 원인이 된 앉은뱅이 책상은 거실탁자 옆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두 딸이 학교에 간 조용한 집에 서 앉은뱅이 책상 앞에
오래 앉아볼 수 있었다. 참나무로 만든건지 어떤건지 알 수 없으나 나뭇결이 선명한 책상위로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 책상위에 까까머리를 수구리고 숙제를 했었을
남편의 어린시절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같다. 역시 잘 가져왔다.
서랍에는 내가 글 쓰는 공책들을 넣어두고 이 책상에 노트북을 놓고서 창 앞에서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비가 오래 오는 날엔 나도 저 글을 쓴 작가처럼 오래 오래 힘주어 책상위에
마른 걸레질을 하며 더 깊은 광이 나게 애써보아도 좋겠다 싶었다.
- 아들이여, 우리도 이 생활에서 그런 빛을 끄집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화공(化工) 약품으로는 도저히 그 영혼의 광택을 끄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투박한 나무에서, 거친 쇠에서 그 내면의 빛을 솟아나게 하는 자는,
종교와 예술의 희열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다. -
수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무언가에 오래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 법을 잊어버린 아들에게 작가는 정성으로 끌어내는
생활의 빛과 윤기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아들을 생각했다.
나와 제일 자주 부딛치는 사람이자 나를 제일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게 하는 사람이다.
부모라고, 어른이라고 그 앞에서 제 생각을 참거나 굽히지 않는 아들..
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고, 아들은 어디서나 제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을 해야할 때와 그 말을 전하는 방식은 너무나 부족하다. 커가면서 수없이 다듬어지고 깎여나가고
반듯하게 만들 몫이 아들에게도 내게도 있을 것이다.
아들만큼 나 역시 부족한 어른이고 더 다듬어져야 할 사람이니 같이 가는 수 밖에..
수없이 이렇게 싸우고 또 화해하고 얘기하면서 같이 가는 수 밖에..
그러다보면 우리 사이에도 또 어른어른한 윤기가 베어날지 모른다. 오래 길들여지고, 오래 다듬어온
내면의 빛들이 환해질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을 돌아 내게 온 나무 책상을 가만히 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