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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도  걸어갈거예요?

"그럼"

"차 타고 가면 안되요?"

"아니, 걸어갈거야"

"힝.. 힘든데..."


열한살 큰 딸 입이 비죽이 나왔다.

조금전까지 목욕탕에서 이를 닦으면서 막내랑 박박 싸운 참이었으니

기분이 더 안 좋을 것이다.


열살이 넘어가면서 딸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기분은 자주 들쑥날쑥 하고 짜증이 늘고,  대개 져주기만 하던 네살 많은

오빠에게도 큰 소리로 제 주장을 편다.

뭔가를 지적 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조금이라도 잔소리가 길어지는가 싶으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엄마, 알아들었으니 이젠 그만하세요" 한다.


태어날때 부터 순했던 딸이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자라면서 두루두루 위 아래를 챙기고 셋중에서

제일 배려심이 많았던 아이라서 부모 입장에서는 늘 고마운 딸 이었다.

엄마를 잘 도와주고, 엄마랑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던 딸은

이제 자주 엄마 이야기에 지루한 표정을 띈다.

만화책을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 글자책 좀 읽으라고 하면

기분 나쁘다는 듯 보던 책을 탁 덮고 일어설 때도 있다.

바쁠때 도움을 요청하면 냉큰 달려오던 딸이

"엄마가 하면 안돼요?" 하며 짜증스럽게 말 할때나,

제가 하던 일이 잘 안 될때 "에이, 짜증나" 하며 소리치는 모습을 볼 때에는

아.. 참 많이 변했구나.. 싶어진다.


화난 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딸을 지켜보며 뒤따라 걸었다.

지난해 12월에 우리집으로 오게 된 블랙 리트리버 '해태'까지 매일 아침

넷이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이 시간을 나는 참 사랑한다.

기분 좋을때는 함께 좋아하는 시들도 암송하고, 노래도 부르고, 가끔은

몸 까지 흔들어가며 걷는 길이다.

꽃 피고, 새들이 날고, 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지나고,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이 길을 큰 딸도 무척 사랑했는데 요즘은 자주 걸어가기 싫다고 불평을 한다.


"어렸을때는 어른들 말 듣는게 힘들지 않아. 모르는게 많고 배워야 하니까..

그런데 네 나이 쯤 되면 네 생각이 쑥쑥 커져. 그래서 자꾸 어른들 생각하고

부딛치는 뾰족한 마음들이 생기지. 지금 니 마음이 그런것 같애.

자주 뾰족뾰족 날카롭게 찔러대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고 있나봐.

크느라고 그래. 네 생각이 자라느라고...

그러니까 잘 크고 있는거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큰 딸은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으며 걷다가

"엄마, 내가 해태 데리고 걸을래요" 했다.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해태의 산책줄을 딸에게 건네 주었다. 해태는 순하게 큰 딸과 걸었다.

커다란 개와 함께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이 성큼 자라보인다.


열한살 딸아이 마음은 자주 고슴도치가 된다.

가끔은 온통 날을 세우고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다 찔러댈 것 처럼

화를 뿜어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벌컥 벌컥 짜증을 부리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날을 세우다보니 열다섯 살 큰 아이와도, 8살 동생과도 자주 싸우게 되고

한 번 싸우면 큰 싸움이 된다.


어른처럼 커 버린 아들과 여덟 살이지만 얄밉도록 제 생각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막내와 수시로 고슴도치 마음이 되는 큰 딸이 한번 붙으면 집안은 거대한

용광로처럼 뜨겁고 맹렬한 분노와 고성이 터져나온다.

한 번씩 그런 일을 겪을때마다 지켜보고 중재하는 일에 몸과 마음이 다 지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들 제 나이대로 크느라고 그러는 것을..


워낙 일찍부터 거세게 반발하는 아들을 키우면서 늘 엄마 마음을 이해해주는

딸에게 기댔었는데, 이젠 딸이 가끔은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세우고 주위 사람들을

찔러대기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  머리로 이해는 하면서도 막상 그런

모습을 대하게 되면 나도 똑같이 날을 세우고 같이 찔러대는 부족한 엄마지만

같이 싸우고, 화해하고, 또 찔러대고, 그 상처들을 쓰다듬으며 지내야 하는 시절을

잘 감당해야지... 다짐하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이렇게 날을 세우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어서

삶의 긴장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내 부족한 모습을 쉼없이 돌아보게 되고

이제는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내 어린 시절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리라.

딸 덕분에 내가 그 시절 내 부모에게 던져대던 바늘들이 얼마나 따가왔을지 이제서야

알아지는 것이다.


딸은 교문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 웃으며 학교로 들어갔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환하고 명랑하다. 다행이다.


다시 해태와 함께 딸들과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간다.

저녁에는 딸이 좋아하는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야겠다.

4월의 햇살이 딸애의 웃는 얼굴처럼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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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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