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 시댁이라는 것은 축복이자 재앙이다.
동해바다와 설악산을 끼고 있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이 있는 곳이라는 점은 축복이지만
바로 그 이유때문에 시댁에 가는 길은 1년 내내 막히는 지독한 고행길이기 때문이다.
석가탄신일이 월요일이어서 3일간 이어지는 연휴에 모처럼 시댁에 가기로 했다.
시댁 할아버님 제사가 마침 일요일이어서 제사에도 참석하고 어머님 모시고 절에도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설에 다녀오고 처음이라 막히는 길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도로사정은 끔찍했다.
토요일 정오에 출발했는데 그야말로 집 앞에서부터 막혔다. 여주까지 가는데 세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정작 큰 일은 여주에서 발생했다. 막히는 길을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고 있는데 옆 차가
계속 빵빵거리며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창을 내렸더니 '뒷 바퀴가 빠질것 같아요' 한다.
뭐라고??
깜짝 놀라 근처 공터에 차를 세우고 살펴 보았더니 정말 한쪽 뒷바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남편이 공구를 찾아 애를 써서 차를 올리고 바퀴를 뺐다가 다시 끼워 보았지만 똑같았다.
여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문 연 공업사를 찾느라 40여분을 소비했고 간신히 찾은 공업사에서
차를 살펴 보았더니 12년간 30만 킬로를 넘게 달린 차의 뒷 바퀴를 연결하고 있는 축이
부식이 심해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있는 상태였다. 수리를 해서 가야하는데 모든 공업사가 연휴에
들어가서 월요일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상태로 강릉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짐이 많은데다 강릉에서도 이곳 저곳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것도 무리였다.
고심하다가 결국 그 차를 타고 국도를 돌며 살살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길에서만 다섯 여 시간을
보내고도 시댁에 못 간 것이다. 집에서 자고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의 출퇴근 용으로 쓰는
작은 차에 옮겨타고 강릉으로 다시 출발했다. 큰 차를 타고 다니던 아이들은 짐이 가득찬
작은 차에 타자마자 아우성이었다. 일요일도 막히는 건 여전해서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덥다고, 힘들다고, 오줌 마렵다고, 좁다고 싸우고 짜증내고 울고 난리였다.
달래고 어르고 야단치고 혼내면서 먼 길을 가자니 나도 죽을맛이었다. 운전하는 남편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다음부터는 다 오지마, 나 혼자 다닐꺼야' 소리를 질렀다.
이 난리를 치며 다섯 시간 걸려 시댁에 도착했더니 몸이 다 꺼질만큼 지쳐 버렸다.
시댁의 제사는 꼬박 밤 열두시가 넘어야 시작된다.
오후에 아버님을 모시고 시댁에 도착해 부엌일을 거들며 제사 준비를 하다가 두 딸은 잠들고
필규만 깨어서 제사를 보았다.
결혼 10년 째지만 제사를 준비하는 절차와 형식은 여전히 어려웠다. 친정 제사와는 너무나 달라서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도포와 망건을 차려 입고 제사를 모셨다. 음복을 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고 났더니 새벽 2시.. 시댁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 것이 3시였다.
다음날 일어나 아침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어머님 모시고 절에 갔다. 남편이 아이들을 보는 동안
법당에 들어가 어머님 옆에 앉아 건네주시는 염주를 들고 어머님이 하는 대로 염불을 외는 시늉을
했다. 내게 종교란 효도와 같다. 어머님이 독실한 불교신자니까 나도 어머님 모시고 절에
다니는 거다. 어머님이 기뻐하시니 함께 다니지만 다른 감흥은 없다. 다만 나를 낮추고 절대자
앞에 절을 올리며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 소중할 뿐이다.
절밥을 한 그릇 먹고 시댁에 돌아와 짐을 챙겨 나선 것이 오후 2시..
시댁에 다녀올때면 꼭 용평리조트를 들려 관광곤돌라를 타는 것이 큰 낙인 아이들을 위해
용평리조트에 들렀다가 오후 4시 넘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끝없이 막히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잠들고 남편은 졸음과 싸우며 지루한 운전을 했다. 휴게소도 너무 차가 많아
들리지도 못하고 덕평에 와서야 간신히 차를 세워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맛없는 휴게소 음식으로 저녁을 때웠지만 남편은 너무 고단해서 저녁도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시 운전을 해서 집에 오니 밤 아홉시..
아이들 씻기고 집안 치워서 잠자리에 든 것은 열한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몸이 쑤시고 목은 잠기고 기운을 차릴 수 가 없다.
우울했다.
시댁 오가는 길이 이렇게도 힘들다는 것이, 그래서 자주 가지도 못하고 부모님 뵙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쉽고 속상했다. 아이들이 더 크면 나 혼자 세 아이 데리고 고속버스 타고
다녀올 수 있을까. 모두 제 짐가방 등에 메고 훌쩍 떠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그때에도 부모님이 모두 다 계실까?
내가 너무 고생한다고 연신 미안해하시는 어머님을 뒤로하고 오는 길엔 늘 눈물이 난다.
먼 곳에 사는 자식들을 맘 놓고 부르지도 못하고, 한 번 오고 갈때마다 도로사정 때문에
맘 졸이시는 어머님이 짠했다.
시댁 가는 길은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힘들고 고단해도 가야한다. 가고 싶다.
어머님 모시고 절에 다녀올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지금은 힘들어도 아이들은 금방 큰다. 언젠가는 스스로 제 가방을 메고 나를 따라 나설 날도
올 것이다. 부디 부모님이 오래 오래 우리 곁에 계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늘 나보다 열 배는 더 고단하게 사시면서도 늘 자식 걱정뿐인 어머님..
한 해 한 해 눈에 띄게 건강이 잦아들고 계신 아버님..
멀어도 힘들어도 며느리는 달려갑니다
오래 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