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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옷이 없으니 분홍색 속싸개로라도 만족할 수 밖에


 



성인 남성복보다 찾기 힘든 분홍색 남아복



아기에게도 색상 선택의 자유를!


 아기가 제법 자라 외출도 하기 시작한 요즘 인터넷질의 가장 많은 시간은 아기 옷구경이다. (교육은 언제쯤 관심 둘거니?)

백화점 홈페이지의 유아 브랜드부터 할인 매장 사이트, 일본 왕실이 선택했다는 값비싼 유기농 제품부터 만원에 세 장하는 보세 티셔츠까지 유아 패션의 세계는 뜻밖에 넓고도 다양하다.

손바닥만한 옷에 온갖 귀여운 프린트가 찍혀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귀여워’, ‘어머나~ 깜찍해라’를 연발하다가 뭔가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다. 무언가 2% 부족한 이 기분은 뭐지?

출산 전 아들이라는 소식에 아쉬워한 인간군 중 일부의 견해는 이랬다. “여자애들 옷은 얼마나 예쁜게 많은데 샤방샤방한 공주 드레스를 입힐 수 없다니, 너 참 안됐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잘됐네, 옷값 절약하겠구만’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러블리 원피스가 언감생심이라는 건 뭐, 여우의 신포도로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아기들옷 중에 분홍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충격적이었다. 여기서 이의를 제기할 분 있을 거다. 백화점의 유아 코너 가면 온통 분홍색 월드인데 분홍색 옷이 없다니, 말도 안돼... 맞다. 지구의 절반이 남자이고 나머지 반이 여자이듯, 유아 매장에 가면 파랑색과 분홍색이 반반이다. 이불도 분홍과 파랑, 내복도 분홍과 파랑, 분홍과 파랑으로 패치워크한 세계다. 옷도 마찬가지.

그럼 분홍색 옷 사입히면 되지 뭐가 문제? 라고 쿨하게 반문할 수 있겠다. 나도 그 생각 해봤다. 분홍색 점퍼 하나를 클릭해봤다. 목과 밑단에는 오글오글한 프릴이, 가슴에는 조그만 리본이, 소매에는 주름넣은 퍼프가 장식돼 있다. 한마디로 ‘저 여자아이거든요!’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옷이다. 아무리 양성 평등의 개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굳이 사내아이에게 누가 봐도 여자옷을 입힐 필요는 없지 않겠나. 게다가 우리 아이는 지나치게 남자다운, 이른바 ‘장군감’ 비주얼이란 말이다.

  

물론 남자옷이라고 다 파랭이만 있는 건 아니다. 변종인 민트색도 있고, 브라운도 있고, 종종 빨강색(남아옷이라기보다 남자아이도 입을 수 있는 정도)도 있다. 하지만 분홍색이 없는 건  은밀한 핑크매니아인 나에게는 섭섭함 이상의 충격이었다. 왜 ‘은밀한’인가. 유치원때부터 분홍색 크레파스만 선호했지만 사춘기 이후 분홍색을 좋아한다면 어쩐지 촌스러워 보여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게다가 나의 외모는 분홍이 어울리는 ‘러블리’와는 거리가 먼 타입. 그래서 분홍에 대한 욕망을 펜 따위의 학용품 정도로 애써 자제하다가 아기를 가지면서 나의 오랜 갈증을 해소해보자 마음먹고 있었다.

왜 성인 남성복에도 드물지 않은 분홍색이 유독 0-3살 유아복에서만 찾기 힘든 걸까. 상투적으로 아이 성별을 확인할 때 ‘분홍색으로 준비할까요, 파랑색으로 준비할까요?’ 묻는 것처럼 색깔은 외모만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어린 아기들의 성별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지의 기능을 하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여자 아기에게 장군감, 떡두꺼비 같은 대참사성 코멘트가 나오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유아브랜드의 정책적 배려. 출산 준비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유아복 매장에 가면 먼저 묻는 게 아이 성별. 남자라고 하면 파랑색 세트가 주르르 눈 앞에 펼쳐진다.

사연이야 어쨋건 너무나 아쉽다. 빨간 점퍼로 분홍색 아기 옷에 대한 갈망을 채워 보려고 애써보기도 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분홍색 담요와 싸개, 딸랑이, 장난감까지 대체용품들을 마련했으나 해소되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뽀얀 아기 피부에는 뭐니뭐니 해도 분홍색이 최고인데, 늘 푸르둥둥한 옷만 입히려니 애의 혈색도 어쩐지 별로 안좋아 보이는 것 같다.

궁리 끝에, 그리고 분홍색의 러블리한 여자 아기옷을 자주 보면서 익숙해지니 이제 구입하려고 하는 민소매 티셔츠는 과감하게 분홍색으로 질러보려고 한다. 드레스도 아니고 티셔츠이니 리본이나 레이스 좀 달려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사나이다운’ 우리 애 얼굴과 옷을 보면서 사람들이 조금 헷갈려한들 뭐 어떤가.

혹시나 이 칼럼을 보시는 유아복 브랜드 관계자분들, 분홍색 남자 아기 옷도 만들어 주시길. (레이스, 프릴, 리본으로 점철되지 않은).  아들에게도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색상선택권을 돌려달라! 영유아 인권 차원에서 이 연사 주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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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 기자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팔랑귀를 가지고 있는 주말섹션 팀장. 아이 키우는 데도 이말 저말에 혹해 ‘줏대 없는 극성엄마가 되지 않을까’,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이라는 ‘꽉 찬’ 나이에 아이를 낳아 나중에 학부모 회의라도 가서 할머니가 오셨냐는 소리라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엄마이다. 그래서 아이의 자존심 유지를 위해(!) 아이에게 들어갈 교육비를 땡겨(?) 미리미리 피부 관리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 목하 고민 중.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해 정작 우는 아이는 내버려 두고 인터넷질 하는 늙다리 초보엄마다.
이메일 :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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