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의 공용 쉼터는 꼬마 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다섯살, 일곱살, 두 아이가 소파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여행안내 책자를 들춰 보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헬로(Hello)에 헬로라고 똑같이 대답하면 된다고 가르쳐보지만, 아이들은 그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지 내 뒤로 숨기 바빴다. 하지만 내가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옆으로 다가와 눈빛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손재주 좋은 큰아이는 말 대신 색종이로 곱게 접은 펭귄, 개구리, 리본 등을 수줍게 건네며 마음을 전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긴장을 늦추고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기 전 남편과 408일간 배낭여행을 했다. 코스타리카의 어느 게스트하우스 벽에서 반가운 한글을 발견했다. 명함 크기의 스티커에 가족사진과 함께 ‘세계는 민혜의 놀이터’라고 쓰여 있었다. 민혜 가족은 멕시코에서 브라질까지, 중남미를 여섯달 여행했다고 한다. 우연히 이구아수 폭포에서 만난 민혜, 나비를 쫓아 나풀나풀 뛰어다니던 일곱살 아이는 눈부시게 밝고 싱그러웠다.
‘엄마 아빠랑 여행하니까 정말 좋아요.’ 서툰 글씨로 여행사 벽에 적어 놓은 자신의 글처럼 그 아이는 재미있게 사람과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제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면, 꼭 아이와 여행을 하리라.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지난겨울 말레이시아로 7주간의 가족 여행을 떠났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교 공부를 미리 시키는 대신 여행 가방을 꾸렸다. 새로운 세상과 다양한 삶을 만나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속도와 효율, 돈을 지불하여 손쉽게 얻는 안락한 여행이 아닌 ‘느린 여행’을 택했다. 고단함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걸었고, 택시 대신 버스와 지하철, 기차를 이용하고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아이들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없지는 않았는데,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 적응했다. 고맙게도 불편함을 재미로 승화시키고 부족함을 상상력으로 채워주었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숙소에서 찬물로 어떻게 씻기지?’ 하고 걱정할 때 샤워 꼭지에서 물줄기가 사방으로 뿜어 나오는 걸 보고 아이들은 그 모습이 우습다며 낄낄대며 즐겁게 샤워를 했다. 숙박비가 무시무시하게 비싼 싱가포르에서 겨우 찾아낸 코딱지만한 방을 보고 실망하기는커녕 환호성을 질렀다. “와, 이런 침대는 처음 봤어!” 조금 색다른, 아래는 2인용, 위에는 1인용인 이층 침대는 순식간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잠자리가 좁아서, 방 안에 화장실이 없어서, 뭐가 부족해서 불행할 거라 여기는 것은 어른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려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아이들 걸음에 맞추어 느리게 걷는 것이 행복했다고, 아이들 눈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더 새롭게 다가왔다고.

(*한겨레신문 2013년 7월 2일자 27면 베이비트리 생생육아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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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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