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반찬.jpg

 

살다보면 사연이 있는 음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처음 떠난 유럽 여행에서 갑자기 닥친 강추위와 몸살로 떨고 있다가

동행에게 얻어 먹었던 사발면 한 그릇을 잊을 수 없기도 하고

셋째 낳고 크게 아파 못 움직일때 가까운 이웃이 만들어서 냄비째

들고와 나를 먹였던 죽 한 그릇이 눈물나게 고맙기도 했다.

또 내 아이가 처음으로 만들어준 토스트를 벅차게 먹었던 기억도 있다.

이 많은 사연 있는 음식 중에서

나는 역시 남편이 만들어 주었던 '감자조림'이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응원으로 떠오른다.  

 

늦은 결혼 1년 만에 첫 아들을 낳았을때 남편도 나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모든 초보 부모가 그렇듯이 우리도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가슴을 철렁이며

애를 태우곤 했다.

6개월 무렵에 37도가 조금 넘는 미열이 며칠 계속 되자 걱정스러워

좋합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원인을 찾아보자며 입원을 권했다.

지금이라면 그런 미열은 큰 걱정없이 지켜볼 수 있지만 그때만해도

경험없는 초보엄마였던 나에게 '입원'이란 죽을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무섭고 두려운 일 이었다.

 

펑펑 울며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아이를 입원시켰다.

체혈을 하느라 아이의 가느다란 팔뚝에 주사바늘이 들어가는 것도

끝내 혈관을 못 찾아 목 언저리에서 피를 뽑아야 했던 것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어린 아이의 몸으로 들어가는

엄청난 항생제의 양과 그 독성에 물같은 변을 쉼없이 지리느라

여린 항문이 헐어 밤새 보채는 것 모두 다 내 잘못같아

울고 또 울며 아이 곁을 지켰다.

 

입원 첫 날 저녁, 남편은 퇴근 후 병원에 오는 길에

집에 들러 도시락을 만들었다며 내게 내밀었다.

어린 아이 돌보느라 밖에 나가 밥을 사 먹을 수도 없고

병원에서 나오는 변변찮은 음식으로 견뎌야 하는

마누라를 위해서 준비한 도시락이었다.

 

서툰 솜씨로 만든 계란말이와, 감자조림이 있었다.

계란말이도 고마왔지만 감자조림을 해 오다니... 놀랐다.

감자를 통째로 얇게 썰어서 고추가루와 소금만 넣고

조린 투박한 음식이었는데 내겐 눈물이 날만큼 고맙고

귀한 음식이었다.

무엇보다 식당에서 사 온 음식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온 것이

감격스러웠다.

 

서른 일곱에 장가를 들어 서른 여덟에야 첫 아들을 안아 보았던

남편으로서도 아이와 아내가 겪는 고통이 마음 아팠을 것이다.

아내는 병원에서 아이 곁을 지키기라도 하지만 직장에 다니느라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입장도 미안했을 것이다.

총각으로 오래 혼자 사는 동안 많이 외로웠을 남편은

늦게 이룬 가정을 아꼈고, 무엇보다 첫 아이에게 흠씬

애정을 쏟던 아빠였다.

그런 귀한 아이가 입원을 하고, 그 옆을 아내가 지키느라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남편은 아이와 아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툰 솜씨로 아내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온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음식이었다.

 

항생제 부작용으로 장까지 탈이 난 아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3일만에 각서를 쓰고 퇴원을 해서 며칠동안 밤을 세워가며 아이를

돌봤고, 아이는 다행히 잘 회복 하였다.

남편이 싸준 도시락을 그 이후로 먹을 기회는 없었지만

재료를 썰고 양념을 해서 만들어 온 '감자조림'에 대한 행복한 기억은

두고 두고 나를 뿌듯하게 했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긴 휴가를 대부분 집에서 일을 하며 보냈던 남편은

휴가 마지막날 저녁을 준비하는 내게

"감자 반찬, 해줄까?" 했다.

"아.. 큰 애 처음 입원했을때 당신이 만들어 왔던 그거?"

나는 반가와서 남편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남편은 우리가 농사지어 수확해둔 감자를 여러개 들고 와

큼직 큼직하게 썰어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조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감자조림이 올랐다.

 

식사.jpg

 

나는 아이들에게 이 반찬에 얽힌 사연을 들려 주었다.

얘기하다가 새삼 뭉클해져서 목이 좀 메이기도 했다.

"필규야.. 니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알겠지?

첫 아이라서, 엄마도 아빠도 첫 마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쏟았어.

이 음식도 그런 마음으로 나온 거고..."

 

아들은 좀 쑥쓰러운 듯, 그러나 기쁜 표정으로 말없이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감자조림을 제일 많이 먹는 것으로 고마운 제 마음을 전했다.

 

14년째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은 여전히 표현도 서툴고, 무뚝뚝 하기도 하고

잘 변하는 마누라 감정에도 무심하지만 그 마음속에 언제나

가족에 대한 따스한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감자처럼 투박하고 언뜻 특별한 맛이 없는 것 같지만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는 그럼 사람이랄까.

 

내게 남편의 감자조림이 특별한 의미이듯이 남편에겐 내가 해준

어떤 음식이 그런 의미로 남아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걸 물어보면 남편은 또 어려운 숙제를 받은 사람처럼 난처해하며

"... 당신이 해 준건 다 특별해..." 어쩌고 하겠지. 하하

그래, 그래 안 물어봐도 안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늘 마누라가 해준 게 제일 맛있다는 사람인데

불평하며, 투덜거리며, 힘들다며 차려준 음식들도 사실은

다 사랑이라는 것을 남편은 알 것이다.

 

농사지은 감자는 아직도 넉넉하게 남아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몇 번 더 남편에게 감자조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봐야지.

 

부모가 만든 음식은 다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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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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