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역.jpg

 

며칠간 남편과 소원했다.

이유는 많았다.

장마철이라 가뜩이나 습도가 높은 집안은 더 눅눅해졌고, 이맘때가 되면

나타나기 시작하는 벌레들이 올해는 유난히 많아서 고생하던 참 이었다.

특히 날개미들이 밤마다 식구들 몸 위로 기어올라와 무는데, 벌에 쏘인

것 처럼 아리고 아파서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자면서 벌레를 잡고

잠자리를 옮기고, 벌레를 없애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늘 잠은 부족하고, 집안은 눅눅하고, 할 일은 많다보니 남편도 나도

예민했었다. 제대로 얘기 나눌 여유도 없이 하루 하루 닥치는 일을

해 내며 고단하게 지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저녁, 마을에서 하는 기타모임에 갔다가 왔더니

남편 표정이 아주 냉랭했다. 그때까지 저녁도 못 먹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저녁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기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내 책상을 노려보더니 말없이 그 위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전부터 온갖 자료들과, 다 쓴 영수증들, 책들이 뒤섞여

쌓여있던 참 이었다.

"내가 정리할게. 내가 할게." 해 봤지만 남편은 대꾸도 않고

물건을 모두 내린 후 상자를 가져다 놓고 영수증부터 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까 내가 할게"

그래도 역시 남편은 말없이 손을 놀렸다.

 

책상 좀 치우라고 한게 언젠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언제 한 번 제대로 치우고 살았냐.

맨날 말로만 치운다, 치운다...

 

남편의 넓은 등짝으로 전해오는 이런 비난들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편 말이 맞다. 난 정리를 잘 안한다. 늘 미룬다.

핑계는 있다. 내가 쓰는 책상은 좁고 긴데, 절반은 프린터와 컴퓨터 본체가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도 모니터와 키보드를 빼고나면 책 몇권 쌓아 둘

곳이 없다. 그래도 명색이 글 쓰는 사람인데 글 한편 쓰려면 자료도 봐야하고

이 책 저책 넘겨봐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만한 공간이 없어 늘 어수선하게 된다.

거기에 세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제 물건들을 올려두고 잊어 버린다.

그래도 남편이 맘대로 정리하는 건 싫다.

버려도 내가 버리고, 치워도 내가 치우고 싶다. 남편에게는 뒤죽박죽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어찌되었던 창작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이럴때 나까지 감정적으로 나가면 큰 부부싸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늘 아쉽다.

나만 쓰는 책상, 내 물건만 놓여져 있는 커다란 책상... 이때껏 꿈만 꾸고 있다.

서재까지 바라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커다란 책상 조차 난

없다. 그러면서 글을 써 왔다. 늘 책과 자료를 들고 좁은 책상에서 애 쓰면서

말이다. 그러다 다른 일에 쫒기고 애들하고 지지고 볶다보면 정리할 사이 없이

다음 글을 쓰게 된다. 번번이 그렇다.

물론 핑계다. 그저 나는 게으르고 미루기 좋아하고 정리 습관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남편은 말없이 책상을 치우고, 물건의 자리를 옮겨놓고, 다 정리한 후에

거실에 편 이부자리 속, 아이들 사이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속상하고 서운해서 안방 침대에 혼자 누웠다.

지저분한 책상이 맘에 안 들면 최소한

'당신이 안 치울거면 내가 치워도 되지?' 정도라도 물어보면 안되나.

갑자기 이런 식으로 사람 부끄럽고 화나게 하고..

그러고보니 요즘 나랑 제대로 대화를 나눈지가 언젠지,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넨적이 언젠지도 모르겠다.

난 남편이 미워서 원망을 꼭꼭 눌러가며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은 벌써 출근을 했고, 바쁜 아침을 보내고

세 아이들 모두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반듯해진 책상이 보이고 남편 생각이 났다.

딸들과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나 혼자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우리 요즘.. 너무 소원하지 않아?"

".... 뭐가..."

"그렇잖아. 말을 섞기를 해. 몸을 섞기를 해.

늘 표정도 어둡고..."

"... 아니야"

" 마누라가 하는게 다 맘에 안 들지? 게으르고 책상 하나 안 치우고...

그런것도 당신 하게 해서 미안해. "

"책상이야 누구라도 치우면 되는거지. 뭘..."

"그래도 그렇게 당신이 맘대로  다 해버리니까 속상하더라. 나한테 말 한마디

안 걸고... 다 내 탓이지만 그래도 서운했어.

다음부턴 잘 치울게... "

 

난 조금 울컥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걸어오는데 바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잠실로 점심 먹으러 올래?"

"점심?"

 

남편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한것도 아니고, 그저 책상이 너무 어수선해서 자기가 나서서

치운건데 상상력 풍부한 마누라는 또 그 모습에서 비탄과 탄식을 이끌어낸 모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요즘 서로 안아본지도 오래고, 그런것들이

마누라한테 좀 미안해져서 맛난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풀고 싶은 것이다.

 

남편의 회사는 잠실이다.

큰 애가 어렸을때 나는 자주 점심을 먹으로 잠실까지 가곤 했다.

전철을 갈아타며 유모차를 끌고 산본에서 잠실까지 오가는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작 한시간 남편 얼굴 보고 오는 일로도 설레서서 그 먼길을 잘도 다녔다.

 

둘째, 셋째가 생기면서 점심에 잠실가는 일을 오래 잊고 살았다.

막내까지 유치원에 들어가고서야 다시 그런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이젠 내가

학교일이며 이런 저런 활동들로 바빠져서 좀처럼 틈을 못 냈다.

 

난 남편의 말에 금방 마음이 풀어져서

".. 잠실까지.... 음... 오늘... 할 일이 많긴 한데...."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미 가겠다고 결심했으면서 말이다.

 

써야할 글과 정리해야 할 것들을 다 미루어 놓고, 나는 이쁜 옷으로 갈아입고

차를 몰아 전철역으로 향했다. 플렛포움엔 뜨거운 여름 햇빛이 가득했다.

 

밥 한끼 같이 먹으려면 전철 왕복만 두 시간이 넘는데다 전날 일이 많았던 터라

고단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다 미루어두고 남편에게 갔다.

지금은 그냥 남편 만나서 서로 얼굴 보며 따듯한 밥 한끼 같이 먹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실역에 내려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툭 친다.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들어오는 남편을 환한 대낮에 만나는 일은 어쩐지 낮설고

또 설렌다.

나는 남편 팔짱을 끼고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좀 사이좋게 지내자, 여보.."

남편은 그냥 빙긋 웃었다.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남편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당신.. 젊어 보이네... 나는 괜찮아?"

"... 이뻐"

나는 한껏 웃었다. 어젯밤 꽁했던 마음은 이미 다 사라져버렸다.

 

뜨끈한 국밥을 먹으며 필규의 여름 자전거 여행과, 윤정이의 사회 숙제와

이룸이가 했던 말들을 주고 받으며 땀나게 밥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분주한 여름 상가들 앞에서 남편과 헤어졌다.

 

부부사이란게 참 그렇다.

작은 일이 쌓여서 큰 상처가 되는가 하면 또 아무렇지 않은 일들로 그것들이

스르르 허물어지기도 한다.

 

"잠실로 올래?"

난 남편의 이 말이 건네는 의미를 잘 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당신 마음 풀어주고 싶어..

잠시라도 당신 보고 싶어..

 

남편이야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나를 부르는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라고 믿고 한달음에 잠실까지 달려간다.

 

부부사이는 매일 구워야 하는 빵이라고 어느 노 작가는 말했다.

매일 새로 굽는 정성, 매일 들여다보고 돌보고 애 쓰는 마음..

그런 노력들이 평생 가는 관계를 채워주겠지.

 

언제든 남편이 부르면 나는 기꺼이 달려가고 싶다.

 

당신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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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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