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8.jpg

가을볕이 곡식을 영글게 하는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여기 저기 추수가 한창이다.

논의 벼를 베어내고 밭의 잡곡들도 정성껏 낱알을 털어 갈무리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집에 있다 심심해지면 막내를 데리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아이란 본디 저를 둘러싼 환경속에서 수없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존재인지라 둘이서 다니는 일이 지루할리가 없다

 

집 근처에서 가까운 귀농운동본부에서 농사 짓는 밭을 둘러보다가 수수밭엘 들렀다.

이룸이는 수수밭이 처음이었다.

아하.... 그 이야기를 해 줄 때가 됬구나..

 

'이룸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알지?'

'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고 호랑이가 떡 다 뺏어 먹잖아요'

'그래, 맞아. 오빠랑 여동생이 기다리는 집에 엄마는 일 해 주고 얻은 떡을 이고

빨리 가야 하는데 호랑이를 만나서 그만 떡을 다 빼앗기잖아.

떡을 홀딱 뺏어 먹은 다음엔 어떻게 했게?'

'엄마를...꿀떡 잡아 먹고, 엄마 옷을 입고 막 애들한테 가서

엄마왔다 문 열어라. 이랬지요'

 

'애들이 문틈으로 털이 북슬북슬한 호랑이 손을 보고 뒷 마당으로 도망쳤지?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서 올라오니까

하느님한테 기도를 했지. 저희를 살리시려면 튼튼한 동앗줄을 내려주세요 하고..'

'그래서 하늘에서 튼튼한 줄이 내려와서 그 줄을 잡고 하늘나라로 가요'

'호랑이는 어떻게 됬게?'

'자기도 하늘에 기도를 했는데 썪은 동앗줄이 내려와서 그 줄을 잡고 가다가

뚝 떨어져 죽지요'

'그래, 그랬지. 호랑이가 떨어져 죽은 데가 바로 수수밭이었어.

그때 죽은 호랑이 피가 묻어서 수수대궁이 이렇게 막 핏물이 들은거라고'

나는 불그죽죽한 수수 이파리를 이룸이한테 보여주었다.

이룸이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예요? 그 얘기가 정말 진짜예요?'

'수수 이파리도 그렇고 줄기도 아랫쪽도 잘 봐. 완전 피 묻은 색이지?

피가 말라붙으면 이런 색이 나거든'

'아... 끔찍해라. 엄마, 이건 정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애요.'

 

수수밭.jpg

 

수수 줄기도 이파리도 붉은 얼룩이 튄 것 처럼 딱 그렇게 보인다.

나도 처음 봤을때 깜짝 놀랐었다. 신기하게도 정말 딱 그 모양이다.

 

'여기가 호랑이가 떨어진데에요?

와... 그 얘기가 진짜라니 정말 끔찍하다... 그런데 옛날집은

어디에 있었어요?'

옛날 집? 아하.. 오누이가 살던 그 초가집 말이구나.

'옛날집은 저기 저기 있었지'

나는 능청스럽게 바로 앞 조금 너른 풀밭을 가르켰다.

'아하... 저기였구나'

이룸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마. 오빠랑 언니도 알고 있어요? 여기가 호랑이가 떨어진데라는거?

우리 수수 이파리 하나 뜯어가서 오빠, 언니 보여주자요'

그래서 우린 정말 붉은 얼룩이 그럴듯하게 번져 있는 수수이파리를

하나 뜯어 왔다.

 

그날 이룸이는 이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 주었다.

'수수 이파리에 호랑이 피가 튀었다요? 나, 오늘

호랑이가 떨어져 죽은 데에 갔다 왔다요'

우리 차를 얻어 타게 된 이웃 아줌마에게도, 길에서 만난

귀농운동본부 활동가에게도 이룸이는 정색을 하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뜯어 온 수수 이파리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내가 말해주는 사연들을 들으며 깔깔 웃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오빠, 언니에게도 이룸이는 달려가자마자

수수 이파리부터 내밀었다.

'오빠.. 나 오늘, 호랑이 떨어져 죽은데에 갔다왔다?

이게 호랑이 피가 묻은 수수 잎이야'

무슨 이야기인지 대번에 눈치 챈 필규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필규야, 너도 알지? 수수 이파리가 왜 이렇게 붉으지..'

'그럼요. 호랑이가 떨어질때 그 피가 묻어서 그런거잖아요'

 

이미 4년 전에 나와 수수밭을 지나며 이 이야기로 신기하고

재미났던 기억이 있는 필규는 눈치빠르게 내 이야기를 맞장구 쳐 주었다.

필규는 이미 컸을때 시골에 왔기 때문에 두 여동생들처럼

정말 진짜로 믿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수수의 생김새를 보며

옛 사람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윤정이도 아하.. 하며 알아듣는다.

윤정이도 꼭 이만했을때 처음 수수밭에 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젠 이룸이 차례구나... 윤정이는 이해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안다.

어린시절에만 통할 수 있는 놀라움과 새로움이 있다.

시골에 사는 일은 그런 놀라움과 새로움을 더 많이

더 그럴듯하게 찾아내게 한다.

아이들이란 얼마나 맑고 천진한 존재들인지, 아직 그 때묻지

않은 마음속에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다채롭고

풍부한 세상이 존재한다. 이따금 아이를 통해 그 세계의

빛을 다시 엿보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엄마가 되어

누릴 수 있는 보물같은 선물이다.

 

이 시절이 지나고나면 이룸이도 담박에 알아챌것이다.

그리고는 옛 이야기속의 한 장면을 진짜로 믿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에 다시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다섯살 이룸이는 아름답고 맑은 시절속에 있다.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의 흔적이라 믿으며 수수 이파리를

들여다보고 윗밭에서 만난 두꺼비가 콩쥐를 도와 주었던

그 두꺼비라고 여기는 날들을 살고 있다.

 

이다음에 이다음에 어딘가에서 다시 수수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때마다 나는 아이들과 놀라고 신기해하며 수수

이파리를 들여다보던 시절들을 그리워 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수없는 이야기를 꺼낼줄 알던

아이들의 시절을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을 감사히 여길 것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이야기속에선 늘 고생하는 호랑이도

콩쥐를 도와주고 지네를 물리쳐 이쁜이를 구해준 두꺼비도

아무쪼록 오래 오래 아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기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힘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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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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