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a5c9f6720e8e1c37f545e82aea404b. » 달달 외운 교과서 내용대로 따라갔는데 아기는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고 분유통이 당당하게 집안에 입성했다. 한겨레 김은형 기자

출산 전 가장 열심히 준비한 건 모유수유였다. 순산을 위한 요가나 걷기운동, 하다못해 호흡법 연습 한번 해본 적 없지만 모유수유 관련 책자는 수십 권 탐독했고 모유수유를 위한 출산준비교실도 갔다. 출산 관련 서적에서도 분유수유 관련 챕터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화들짝 피했으며 어쩌자고 분유병도 구입하지 않았다. 모유수유 실패의 원인 중 하나가 아기 배 곯을까 걱정스러워 분유수유를 강요하는 집안 어른들이라는 말을 책에서 본 뒤 아기에게 분유를 주려는 친정엄마에게 “안 돼~”라고 소리치며 잠에서 깨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전조부터 심상치 않았다. 모유수유를 하기 위해 특급호텔 숙박비 뺨치는 모자동실에 입원해서 아기에게 젖 물리는 순간만을 기다렸건만 출산 직후 고열에 시달리며 모유수유 불가 판정을 받았다. 결국 아기의 생애 첫 식사는 수저로 떠먹는 차가운 분유가 됐다. 아이스팩 두 개를 껴안고 해열제를 먹어가며 체온을 낮춘 다음날에야 비로소 젖을 물렸다. 젖이 불기는커녕 출산 전과 똑같은 상태였다. “원래 아기는 쑥쑥 잘 낳아도 젖은 못 먹이는 게 우리 집 전통이라니까”라는 언니의 해괴한 가풍론은 당연히 패스! 나오는 게 없는 것 같았지만 처음에는 원래 그렇다는 책의 내용을 계시처럼 의지하며 모유수유 미션을 가열차게 진행했다.

그렇게 젖을 물리다가 퇴원을 하고 이틀 뒤, 모든 게 달달 외운 교과서 내용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젖이 적게 나오는 건 정상이라고 하나 기저귀가 적게 나오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하루 6개는 나와야 한다는 기저귀가 1개 나왔다. 기저귀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건 ‘쉬’를 터무니없이 적게 한다는 이야기였고, 이건 젖을 터무니없이 적게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퇴원날부터 젖이 부족하니 분유를 같이 먹이라는 엄마와 대판 싸웠던 나는 부랴부랴 애를 둘러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기는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글로 배운 모유수유’의 부작용이었다. 어떤 책에도 ‘무조건 모유를 물린다’ 다음 ‘젖이 부족한 아기가 탈진한다’ ‘엄마에게 정신나간 ×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따위의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입원시켜 수액을 맞히라는 의사의 권유를 잘 먹이겠다는 약속으로 떨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완벽한 패잔병이었다. 육아에 관한 모든 결정권이 순식간에 육아 경험 있는 ‘집안 어른’들로 이양됐다. 우리 집 출입 금지를 선언했던 분유통이 당당하게 입성했고, 친구로부터 물려받았으나 외면당했던 다섯 개의 유리 젖병이 주방의 상석에 터를 잡았다. 분유를 먹으면서 아기는 보란 듯이 하루 10개도 넘는 젖은 기저귀를 제출했다.

이후 10만원도 넘게 주고 빌린 유축기 효과도 별로 못 봤지만, 흘러나오는 젖을 막아주는 수유패드는 여전히 쇼핑백에 처박혀 있지만, 그래도 출산 뒤 30일을 넘긴 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무조건 자주 물려야 한다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조언과 격려와 마사지에 힘입어 매일 젖을 물린다. 다행히 순한 아기는 ‘유두 혼동’(젖과 분유병 꼭지를 같이 물리면 아기에게 혼동이 와서 대부분 빨기 힘든 젖을 거부한다고 함) 없이 주는 대로 열심히 젖을 빤다. 물론 젖을 먹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당장 메인 디시를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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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 기자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팔랑귀를 가지고 있는 주말섹션 팀장. 아이 키우는 데도 이말 저말에 혹해 ‘줏대 없는 극성엄마가 되지 않을까’,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이라는 ‘꽉 찬’ 나이에 아이를 낳아 나중에 학부모 회의라도 가서 할머니가 오셨냐는 소리라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엄마이다. 그래서 아이의 자존심 유지를 위해(!) 아이에게 들어갈 교육비를 땡겨(?) 미리미리 피부 관리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 목하 고민 중.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해 정작 우는 아이는 내버려 두고 인터넷질 하는 늙다리 초보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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