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unsplash)
어느 날 나는 궁금해졌다. 결혼이 이런 모습으로 고착화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남자가 밖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고 여자가 안에서 살림과 육아를 맡아 한다는 이 시나리오는 어떻게 이렇게 공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프랑스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유명한 저서 《남과 여》는 이런 물음에 긴 서사시로 대답해준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남녀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변화의 동인은 무엇이었는지, 그에 따른 권력 변동이 어떤 양상을 띠었는지를 생물학적·인류학적·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다채롭게 조명한다.
바댕테르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를 거느리고 보호한다는 개념의 가부장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200년 전부터였다.
“가부장제의 쇠퇴는 아버지가 권한을 잃은 것과 여성이 권한의 분배 방식을 바꾼 사실로부터 초래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는 아버지에게서 신적인 대부권을 빼앗았고, 20세기는 도덕적 권위와 경제적 독점권을 완전히 앗아갔다. 가부장제를 여성의 임신 통제와 업무의 성적 분담으로 규정지을 수 있었다면, 최근 20년 사이에 여성은 이중적 승리—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임신 조절과 남성과의 경제권 분담—을 이뤄낸 것이다. 그 이후로 여성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다.” _182쪽
‘신=왕=아버지’로 대표되던 큰 축이 무너진 것이 가부장제가 낸 최초의 파열음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단번에 끝나지 않고 길게 끌면서 조금씩 스러져갔고, 그 끝물에 이르러 껍데기만 남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가부장제의 귀퉁이가 허물어져 내리는 만큼 여성의 권리도 조금씩 면적을 넓혀간다. 바댕테르는 이를 “풍습의 변혁이 완성되기까지는 몇 세기가 필요하다”고 표현했는데, 이 한 문장이 내게로 와 강렬하게 내리꽂혔다. 결혼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머물렀던 자리에서 내려와 그보다 훨씬 낮은 자리로 가라는, 그 자리에서 고분고분 ‘여자의 도리’를 행하라는 합창을 사회 각계각층에서 매일매일 들으며 들끓어 올랐던 내 마음을 이 문장이 차분히 가라앉혀주었다.
저자가 속한 서구권과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참 달라 보였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기다려라. 너를 괴롭히고 있는 그 제도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 지금 이는 것은 여진일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핵심부의 지진은 끝났고 그 여파는 그리 길게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작가의 서술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점진적으로 그들의 권한을 양도하면서 여성은 본래 그들의 몫이었던 책임감에서 해방된다. 그 대신 그들은 거기에서 수동성의 달콤한 즐거움과 마조히즘적인 욕망의 비밀스런 만족도 얻은 것 같다.” _161쪽
선사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기간에 여성의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압도적으로 남성에게 넘어갔는지를 묘사하는 대목 끝에 나오는 문장이다. 권력을 빼앗기고 남성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달린 위치로 전락하면서, 여성들은 고통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른한 수동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복종하면서 사는 삶의 안락함. 이 부분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나를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안에 그런 부분이 없었다면 그 문장을 그렇게 매끄럽게 이해하지 못했을 터, 나는 그제야 내가 속하지 않은 성별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던 단순하기 그지없는 양태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눈을 크게 뜨고 내 모습을 주시하게 되었다. '남자가 뭐가 어쩌네, 결혼이 뭐가 어쩌네' 하지 말고 네 모습을 봐라. 너는 '기대는 성별'이 아닌 '자립하는 성별'이 되기 위해 투철히 노력했는가?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아니, 안 그랬어. 남편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남녀 성별분업을 행하려고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가 편리한 분야에서는 자동적으로 성별분업을 행하려 했던 것이다.
작가는 남녀 관계의 변천사를 전개해가면서 남녀가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냉철하고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권력을 일방적으로 빼앗아가는 입장의 남성에게 양가감정이 있었던 것처럼, 권력을 빼앗기는 입장의 여성에게도 양가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권력을 빼앗겼던 선조 여성들의 경험을 대리 체험하면서, 나는 현재 내 안에 들어 있는 양가감정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책의 효용은 그 지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남들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네 안에 있는 가부장적 선입견부터 타파해라’ 하는 경각심 같은 것. 정신 차리고 너부터 뜯어고치라는 준엄한 호통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