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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겨울, 케이티가 태어나자마자 우리 부부가 한 일은 이 질환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일이었다. 인구 십만 명에 한 명꼴로 나타난다는 희소질환. 그런 만큼 한국어로 이 질환에 대해 알아보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당장 구글 검색 창을 켜고 출산 당시 병원에서 건네 주었던 쪽지를 펼쳤다. 클리펠-트리나니 신드롬. Klippel-Trenaunay Syndrome. 아무리 들여다봐도 익숙해 지지 않던 그 한 글자 한 글자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넣은 다음 엔터 키를 눌렀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물론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설명이었지만, 그 다음 항목에 아주 간결하고도 명확한 이름의 웹사이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로 KT 서포트 그룹. KT 환자와 그 가족들이 모여 꾸린 단체라는 뜻이다.

 

이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단체를 이끌어 온 사람은 바로 나처럼 KT 아이를 둔 엄마 주디(Judy)와 멜리니(Mellenee). 이 두 사람이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있는 한 대형 병원 의사들을 통해 다른 KT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모임의 규모가 커졌고, 이제는 2년에 한 번씩 한 자리에 모여 유명 의료진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까지 만들 정도가 됐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 인도, 중국, 브라질 등 세계 여러 나라의 KT 환자 및 가족들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2012년 겨울 처음 이 모임을 알게 되고 회원들간에 이메일과 페이스북 포스팅으로 오가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KT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아이의 발에 처음으로 이상이 생겼을 때, 나는 이 사람들을 붙들고 하소연했다. 이제 5개월 밖에 안 된 아이에게 처음 압박 스타킹을 신겼던 날에도 나는 아이의 사진을 찍어 이 곳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새로 나온 논문을 읽다 궁금증이 생기면 나보다 더 오래, 더 많이 이 질환에 대해 공부해 온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아이의 이름에 케이티라는 별칭을 붙여 <베이비트리>에 글을 쓰게 되는 데에도, 또 내가 직접 한국 KT 서포트 그룹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데에도 이 서포트 그룹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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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을 만나러, 지난 주말 긴 여행을 다녀왔다. 2년에 한 번씩 크게 열리는 KT 서포트 그룹 주최 의학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려야 가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열리는지라 경비가 제법 많이 드는 일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올해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무리를 했다. 도저히 우리 형편에 경비를 다 마련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해 친구/지인들로부터 소액 기부를 받고, 컨퍼런스에 다녀와서 그 내용을 내 영문 블로그에 올리겠노라 약속했다. 우리를 응원하는 많은 친구/지인들의 마음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와야 했다. 1 2일간의 컨퍼런스 기간, 의사들의 발표와 토론을 보며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기록하고 생각하고 질문했다. 덕분에 그 동안 가져왔던 궁금증의 다수가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풀렸고, 의사들의 발표와 토론 내용 대부분을 이해하고 소화해내는 나 자신이 기특(?!)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논문을 읽어 내려가던 지난 날들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의 치료 계획을 위한 의학 정보도 중요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바로 같은 어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 자체였다. 십만 명에 한 명씩 있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걸 보는 건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양쪽 다리 모두에 압박스타킹을 신고 절뚝이며 걸어 들어오는 젊은 여자, 한쪽 손에 검붉은 얼룩과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가진 잘생긴 청년, 양쪽 다리에 압박스타킹을 신고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중년의 남성, 무슨 사연이었는지 끝내 절단술을 하고 휠체어를 타게 된 십대 소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쥐고 앉은 부모, 형제, 자매, 아내, 남편들. 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게 참으로 편안했다. 평소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이 KT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하게 되어 있는데,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손 한 번 잡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참 편안했다.

 

이 자리는 우리뿐 아니라 케이티에게도 그런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 나는 왜 이쪽 (오른쪽) 발이 커?” 하고 묻는 아이에게 늘 설명을 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아이는 이제 자신의 다리가 KT 때문에 그렇다는 것 까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평소 자기 다리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질문은 다시 꼬리를 물곤 했다. “엄마, 나는 왜 KT?” “포트와인스테인은 왜 있어?” “나는 왜 신발이 이렇게 커?” “나는 왜 여기가 아파?” 등등을 물어대며 아이는 참 많은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자신의 발과 비슷한 발 모양을 한 또래 아이를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고도 귀한 경험이다. 어른들이 의사들의 발표를 듣는 동안 아이들은 한 공간에 모여 함께 놀았는데, 그 자리에서 케이티는 자신의 발 모양과 비슷한 발을 가진 누나 미아(Mia)를 만났다. 아이는 그날 이후 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미아 누나는 왼쪽 발이 KT, 나는 오른쪽 발이 KT.” 하고 말한다. 그만큼 아이에게도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만남이었으리라


컨퍼런스 둘째 날, 아이티 출신의 패션모델 벌란지(Berlange)는 예쁜 롱 드레스 안에 숨겨져 있던 KT 다리를 우리 앞에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나를 보던 의사들은 내가 열 아홉이 되기 전에 이 병으로 죽게 될 거라고 했어요.” 2016년 현재에도, 아무리 유능한 의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도 누구 하나 KT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은 있을 수 없는 현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은 이런 우리를 가엾게 보거나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간다. 때로는 한탄하고 때로는 분개하고 종종 고통스럽지만, 또 하루 하루 즐겁기도 기쁘기도 한 보통의 삶을.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의사들이 있는 한, “우리는 가족” 이라고 입 모아 말하는 서포트 그룹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내 아이는, 외롭지만은 않을 거다. 그리고 10년, 20년 뒤 한국에서 의사들, 환자, 가족들을 모아 한국 KT 컨퍼런스를 열게 되는 그 날까지, 나는 또 달릴 거다. 내 사랑, 내 운명 케이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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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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