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만에 날이 풀렸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주중 공휴일, 늦잠은 어찌나 달콤하던지.

조금 더 잠을 청하고 싶었으나 아이 둘 돌보느라 늘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눈을 떴다.

따뜻한 햇볕이 커튼 사이로 비치고 방바닥은 온기가 남아 일어나기 싫었지만

정말 간만에 어디론가 떠나야 할 듯한 날씨에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거실에서 나와 자연스레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범섬과 태평양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날이 맑아 범섬 앞에서 나뉘는 파도의 색깔차이가 또렷이 보였다.

따뜻한 햇볕에, 바다가 보이는 거실이라..


이제 쇼파만 놓고 누워서 한번 바다를 볼까


라는 생각으로 벽에 기댄 쇼파를 돌려 창문 앞에 나란히 둔다.

아이들은 베란다 창틀에 올라서서 정원(우리집은 1층이다)에 놀러온 새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는 쇼파에 누워 바다를 보았다. 사과도 하나 깎고 아내가 준비한 커피도 맛있게 마셨다.

첫째는 아빠, 우리 캠핑하는 것 같다하며 좋아라 하고

둘째는 기분이 좋아 바다다하고 뜻도 모르고 나를 따라했다.

,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고 밖을 나가지 않고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햇볕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였지만 우리는 쇼파에서 그림책을 읽고, 미로찾기를 하고,

웃고 떠들며 오후를 보냈다.

짧게만 느껴지던 오후가 이 날은 어찌나 길던지.

저녁에 퇴근하고 아이를 저녁 8시에 재워야 해서 늘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늘어난 듯 마법의 오후시간은 내게 일상속의 큰 선물을 주었다.


동네 놀이터 나들이도 이어졌다.

내가 첫째 손을 잡으면 첫째는 둘째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이럴 때보면 첫째가 둘째를 아끼는 모습이 참 대견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모습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누가 놓고 간 축구공을 잡은 둘째, 첫째에게 하도 뺏겨서 인지 품에 안고만 다닌다.

둘째에게 뺏아서 공은 발로 차는 거라며 몇 번을 시범을 보여주었건만

집에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공을 안고만 있었던 둘째.

집에 갈 때는 왜 그냥 두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공을 안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첫째는 내일 유치원 등원을 앞두고 절친을 놀이터에서 만났다.

마침 절친의 아빠도 나오셨는데 멀찌감치에서 눈인사만 잠시 나누는 아빠들.

두 절친은 방학동안 못 보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공주놀이를 할건지,

엄마아빠 놀이를 할건지를 다투지 않고 함께 요리를 한다며 정신이 없다.

나무판자 위에 낙엽과 가지를 올려서 내게 먹어보라고 가져왔고 나

는 메뉴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맛있게 먹는 척했다.

서로 마주보고는 힘껏 웃는 아이들..


집에 돌아와서 저녁 먹고 나니 이제 잠 잘 시간이 다 되었다.

첫째가 아빠, 나 유치원 안가고 하루 종일 아빠랑 놀고 싶어라고 했다.

해솔아, 아빠도 회사 안가고 하루 종일 해솔이랑 놀고 싶어. 근데..”,

아빠, 밤이 안 왔으면 좋겠어. 밤에는 자야 되잖아. 나는 잠자는 거 싫어”.

나도 어릴 때 잠 자는게 싫었고 지금도 잠 자는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왜냐면 아침이면 또 출근해야 하니까)

하지만 대답은 이렇게 해줬다.


해솔아,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거야.

낮만 계속되면 사람들이 잠을 못자고, 노는 것도 계속하면 재미가 없어”.


아이와 잠이 들며 예전에 읽었던 죽음에 대한 동화를 떠올렸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삶이 값어치 있다.

일이 있어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누릴 줄을 안다.

물론 그것도 체력이 남아있어야 하겠지만..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하루, 아쉽게도 해가 저물고 우린 또 눈을 감아야 한다.   


베란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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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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