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먹는 아이, 저녁밥을 천천히 지어먹기 힘들어진 가정을 위해
2013년 일본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인 어린이식당.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2016년 5월에 처음 시작해, 지금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한달에 두번, 40여명의 동네 아이들과 젊은 엄마, 아빠, 그리고 혼자 사시는 노인분들이
꾸준하게 우리 어린이식당을 이용하시고 있다.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된 2013년에는 도쿄 지역에만 수십 개였던 식당이
우리 동네에서 시작된 2년 전만 해도 300, 400여개라고 하던 것이,
5년이 지난 올해는, 일본 전국에 2000여 곳이 넘는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아마,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식당 수까지 고려하면
실제 어린이식당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5년 사이, 그만큼 어린이식당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도 있고
누구나 만들기 쉽다는 점,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보조금이
어린이식당의 확산을 활발하게 도운 것 같다.


어린이식당이 비교적 수월하게 운영되는 배경에는
지역의 다양한 개인과 기업, 단체로부터 식재료를 기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우리 동네 어린이식당에 직접 텃밭에서 기른 제철 채소를 가져다 주시는
주민분들의 모습이다.

무, 대파, 감자, 고구마, 시금치 ...
시판되는 채소들과는 많이 다른 비주얼의 채소들이지만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 키운 채소들을, 그날 바로 수확해서 아이들을 위한
반찬으로 만들 때마다 감사함, 뭉클함, 세상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다.
이분들께, 가져다주신 채소로 만든 한끼 식사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다시 보내드리면 너무 기뻐하신다.


우리 식당이 문을 연 지, 1년 쯤 되었을 때
칠판 아트를 하시는 동네 분이, 손수 만드신 어린이식당의 간판을
기부해 주신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 이건 찍어야 돼! 싶은, 귀여운 간판!!

한사람한사람의 힘과 재능이 보태어져,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린이식당의 힘이 느껴진다.


올해는 큰아이가 수험생이라
내가 어린이식당을 쉬는 날이 많아졌다.
얼마전에 그만둔 직장을 아직 다닐 때에는, 저녁밥을 하기가 힘들어
우리도 어린이식당의 손님이 되어 먹으러 가기도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힘들 때는, 내가 얼른 가서 도시락 통에 밥을 사 오기도 한다.

아이들은 고등학생까지 무조건 100엔(약 1,000원)
어른은 300엔(약 3,000원)

네 식구의 한끼 식사가 다 합쳐도 8000원, 만원을 넘지 않는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다.
새로운 돈을 버느라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허덕일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재료, 버려질 위기에 있던 재료들과 사람들의 재능, 관심을 한곳에 모아
나눌 수 있는 세상.
처음엔 내 힘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문화가 정착되고 나면, 나도 자연스럽게 혜택을 누릴 때가 오고
우리 아이들도 그런 문화 안에서 자라나, 어른이 되면 또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그런 환경.

2년 전, 베이비트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 일본의 어린이식당을 소개한 뒤
제일 처음, 한국의 제주에서 어린이식당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다음은 서울시 중구에서 중구청이 주도가 되어 어린이식당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한국 어딘가에서 어린이식당을 시작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다.

어린이식당으로 잇는 아시아의 연대.
내가 한국사회에 어린이식당을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 차를 달리면
막 수확을 끝낸 논과 밭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생협과 어린이식당을 통해,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지인의 논에서
뜨끈한 국을 한솥 끓여,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후후 불며 나누어 먹었다.

복잡하고 생각할 게 너무 많은 세상과 육아 속에서 허덕이며 사는 우리지만,
그냥 가끔은 이렇게 함께 모여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다.

좀 촌스러운 육아.
그런 게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도쿄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어린이식당 운동, 음식으로 잇는 아시아 육아의 연대,
그런 거창한 제목보다 내 생각에,
어린이식당은 그냥 좀 촌스러운 육아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동네 엄마들이 한 곳에 모여 아이들 밥 한끼 해 먹이는 것.

그렇게 촌스럽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육아가
아이들에게도 우리 어른들에게도 많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세상 모두가 좀 더 따뜻하고 행복해 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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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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