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아이19.jpg

 

목이 잠긴지가 한참 되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목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기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콧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침 삼킬때

아픈 것도 아니고 몸이 으슬으슬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목소리만

탁해졌을 뿐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찬 거 안 마시고, 잘때 배라도 덮고 자고, 조금 잘 챙겨 먹으면

지나가려니 생각했다.

 

애들 방학이 시작되면서 하루 종일 세 아이와 같이 지내는 일이란

매일 투닥거리며 지지고 볶는 일상이었다.

목 좀 잠겼다고 딱히 나에게 더 신경쓰는 것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너무 더워서 낮에는 맥을 못 추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3주가 지나도 변화가 없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았고 노래는 부를 수 도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가지 싶어서 동네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설명을 듣고 목을 보더니 후두내시경을 볼 수 있는

큰 이비인후과에 가 보라고 하면서 진료의뢰서를 써 주었다.

동네 병원 가는 것도 나들이라고 좋아하며 따라나선 세 아이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큰 이비인후과에 가서 목구멍으로 기다란

쇠막대기를 쑥 집어 넣어 성대 사진을 찍었다.

"성대에 뭔가 있네요"

의사는 사진을 가리켰다.

왼쪽 성대에 하얀 돌기같은 것이 보였다.

"성대 폴립입니다. 더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합니다." 하면서

최소 대학병원 정도는 가 보라면서 또 진료의뢰서를 써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난 좀 심각해졌다.

본래 병원도 아주 아주 싫어하지만 대학병원은 정말 얼씬도 하지않으며

살아왔는데 검진을 받아야 한다니...

 

진료 예약을 하고, 이른 아침 세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엄마는 심각한데 진료 끝나고 냉면을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로 아웅다웅 하는

세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거 정말 내가 크게 아프기라도 하면 이 철없는 것들을

어쩌나' 하고 한숨이 나왔다.

 

전문의한테 특진을 받았다.

검사 과정은 똑같았다.

결과는 '성대결절'이란다.

성대에 무리가 가서 굳은살처럼 되버렸고, 성대 양쪽에 돌기가 생겼단다.

2주간 센 약을 먹어가며 경과를 보고 2주 후에 수술 여부를 결정하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왔다.

 

성대결절이라니... 노래 많이 하는 가수들이나 걸리는 병, 아닌가?

내가 목을 많이 쓰는 직업도 아니고, 그저 살림하며 세 아이들한테 잔소리하고

야단치는 것이 고작인, 평범한 사람인데 성대에 무리가 쌓였다니..

 

자료를 찾아보니 가장 좋은 치료는 목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2주 정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면 좋다는 것이다.

오호..

방학이라 세 아이랑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데 말을 안 하고 살라니..

이건 마치 웃긴 영화를 보여주면서 절대 웃으면 안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약을 한 보따리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래 오래 생각에 잠겼다.

성대결절이라...

이 나이에, 이 시기에 이런 증상이 나에게 왜 왔을까.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은 '동의보감'을 풀어쓴 책에서

'모든 병은 메시지다'라는 말과 함께

병이야말로 나 자신과 세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새삼 내가 목으로 질러온 소리들을 돌아보고 있다.

크게 웃고, 크게 울고, 크게 말하고, 유난스럽게 떠들어대고, 버럭 버럭 소리지르며

화 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그저 보통의 살림하는 사람 모습이었다 해도, 내 목은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질러댄 소리들이 내 목에 계속 쌓이고 있었나보다.

한 번 화가나면 속에 있는 것은 다 질러내야 하는  내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병원에 다녀온 후 나는 무엇보다 말을 줄였다.

필요한 말만 나직하게 건넸다.

자주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목을 따듯하게 하고, 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지내고 있다.

14년간 육아를 하면서 처음 겪는 새로운 경험이다.

혼자 있을때야 말을 할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과 같이 있을때는 늘 큰 소리로 부르고

이야기를 하고, 크게 웃고 울던 나였다.

그러면서 느끼는게 생겼다.

전에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안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큰 소리 없이도 하루가 그럭저럭 지나는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 화와 급한 성격을 못 이겨 소리를 질러왔던 것이지,

큰 소리가 아니면 안 움직이는 아이들이 아니었던 거다.

 

세 아이랑 함께 지내는 방학이면 으례 하루에 몇 번씩 큰 소리가 나고,

다툼과 야단이 오가던 집안 풍경도 변했다.

아이들이야 여전히 싸우고, 투닥거리고, 울고 야단이지만

적어도 나는 예전처럼 같이 버럭거리며 야단치고 화내지 않는다.

그냥 나직하게 부탁할 뿐이다.

가끔 화가 치밀어오를때도 있지만 낮은 목소리로도 내 감정을 전할 수 있다.

아이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내 감정이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방학은 아직도 길고, 약은 이제 겨우 이틀째 먹었을 뿐이다.

재검사를 할 때까지 열흘도 넘게 목에 신경을 쓰며 조심 조심 지내야 한다.

처음에는 몹시 힘들줄 알았는데 지내보니 지낼만 하다.

오히려 오래 젖어왔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모든 병은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증상만 없애려고 애쓰다보면

정말 그 증상을 통해서

내가 깨달아야 할 지혜들을 놓치게 된다.

성대결절을 손님처럼 잘 대접하며 지내면서 내가 돌아봐야 할 내 모습에

집중하며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공부를 잘 해서 더위가 지날때쯤에는 본래의 내 목소리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여름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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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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